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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87 다음날 아침의 공격에서도 북한군 지뢰지대에 봉착해 2대의 전차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피해를 입고 난 후, 미 해병은 공병의 수작업으로 지뢰지대를 하나하나 제거하고 전차를 진출시켰고 이로 인해 작전속도는 매우 완만하게 변했다. 50) 하 루 2~3km의 진격속도로 전진하는 미군의 늦은 진격속도를 이용하여 북한군은 9 월 18일부터 해주, 서울 서측방(연희동, 마포 일대)과 영등포 서측 구릉에 상당히 강력한 진지를 형성할 수 있었다. 51) 김일성이 낙동강 방어선 고수의 엄명을 내린 채 인천-서울로 지방의 예비연대 들을 계속 끌어들이고 있을 때 북경과 모스크바에서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 군의 전력에 대해 보다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김일성의 작전지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장이 변변치 않고 훈련이 되지 않은 지방 예비연대들 을 하나씩 하나씩 축차적으로 서울에 투입하는 것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고 내다보았다. 반드시 낙동강전선에서 주력사단들을 서울로 전용해야 인천-서울 의 방어가 가능하고 주력부대가 포위망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 판단 했다. 9월 18일 스탈린은 소련군 총참모부와 소련군사고문단을 통해 김일성에게 낙동강전선으로부터 ‘4개 사단’을 끌어올려 서울 주변의 방어를 강화하도록 하라 는 지시를 내렸다. 52) 9월 18일 김일성은 중국대사 예지량을 만난 자리에서 미군 은 이미 서울에 접근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북한군이 새로 창설한 2개 연대들은 작전경험이 없고 전투력이 약하며, 증원부대는 아직 도착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그는 10~15개의 사단 창설 지시를 내렸다는 말을 하며 인천상륙작전 후의 북한이 처한 상황을 알려주었다. 53) 로쉰으로부터 이같은 상황을 보고받은 주은래는 9월 20일 주 평양 중국대사 예지량에게 전문을 보내, 김일성을 만나 적들이 서울을 50) Montross and Canzona, The Inchon-Seoul Operation, pp.209~211;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p. 512; 라주바예프 보고서 제1권, 232쪽. 51) 라주바예프 보고서 제1권, 383쪽. 52) 스탈린이 이러한 지시를 내렸다는 것은 스탈린의 소련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의 결정서 형태로 평양의 슈티코프 대사에게 보낸 9월 27일자 전문과 스탈린이 모택동· 주은래에게 보낸 1950년 10월 1일자 전문에 나타나 있다. "Telegram from Fyn Si(Stalin) to Matveyev(Army General M. V. Zakharov) and Soviet Ambassador to the DPRK T. F. Shtykov, approved 27 September 1950 by Soviet Communist Party Central Committee Politburo", translated by Alexandre Y. Mansourov, CWIHP Bulletin, Issues 6-7, pp.9~11; 「스탈린이 모택동과 주은래에게」(1950년 10월 1일), Torkunov, Zagadochinaia voina, pp.113~114. 53) 군사편찬연구소 역, 중국군의 한국전쟁사 (서울: 군사편찬연구소, 2002), 제1권, 1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