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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86 군사연구 제130집 터 북상해 온 제105땅크사단의 전차 약 20대였다. 47) 서울에서는 최광이 서울방어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시가전 준비를 했다. 한강철 교 자체는 서울에 있던 철도대대와 공병대대가 방어를 담당했고, 서울 시가에는 수많은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방어공사에 9,000여 명의 서울 시민이 동원되었고, 그외는 10만 명의 서울 시민이 동원되어 시내에 700개 이상의 바리 케이드가 설치되었다. 48) 그러나 북한군측에서 훈련이 불비한 잡다한 부대들을 조급하게 배치한 가운데 미 해병부대들은 9월 17일 김포비행장을 점령하고 행주 남쪽에서 한강 남안까지 도달했다. 많은 병사들이 인천에서 영등포로 향하는 길에서 미군의 포병화력과 간단없는 공중공격에 전의를 잃고 포로가 되었다. 북한군 입장에서 볼 때 다행인 것은 미군의 진격이 매우 느렸다는 점이다. 그 것은 미군 지휘관들이 속도보다는 안전을 우선하는 작전방식을 택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미군 보병들은 공격을 시행하기 이전에 항공기와 야포로 북한군 진지에 엄청난 양의 공중폭격과 야포 사격을 가한 후 서서히 전진했다. 미 해병 부대들 은 해가 질 무렵이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장기(長技)였던 야간 공격과 침 투를 회피하기 위해 진지를 선정하고 참호를 판 다음 그 자리에서 다음날 날이 밝을 때까지 방어를 수행하며 진지를 고수했다. 미군의 조심스러운 진격에 북한 군은 시간을 얻어 9월 16일, 17일 밤을 이용하여 주요 도로에 약 500여 개의 대 전차지뢰를 설치할 수 있었다. 49) 이같은 북한군의 조치는 9월 18일 전투부터 효 과를 나타냈다. 9월 18일 오전 8시 10분에 항공공격, 포격으로 공격준비사격을 시 행한 후 보병과 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시작한 미 해병 제1연대는 공격작전 중 소 사 동쪽 고지대에서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지대에 걸려 3대의 전차를 상실했다. 47) Montross and Canzona, The Inchon-Seoul Operation, pp. 325~326; Zhurnal, 1950년 9 월 18일자. 애플만에 의하면 약 55~65대의 북한군 전차들이 인천, 서울, 수원에서 파괴 되었다.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p.541. 48) Voina v Koree 1950~1953, p.125. 최광이 언제 서울방어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지는 확 실치 않지만 그는 9월 24일에는 그 직에 있었음이 노획문서에 의해 확인된다. 최광의 명령, 「문화부사령관 동무 앞」(1950년 9월 24일), 국방군사편찬연구소 편, 6․25전쟁 북한군 전투명령 (서울: 국방군사편찬연구소, 2001), 177쪽 참조. 49) Voina v Koree 1950~1953, p.123. 주영복 공병소좌는 두 개 공병소대를 이끌고 바로 이 지뢰매설 작업을 지휘한 후 UN군측에 자진 투항했다. 주영복, 내가 겪은 조선전쟁 제1 권, 493, 502~5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