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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85 부대로 한강 하류의 북한과 영등포 서쪽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방 어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43) - 서울 서북쪽 25킬로미터 지점인 예성강과 한강의 하구에 1개의 국경경비연대 - 행주를 포함하여 행주에서 한강교까지는 제78독립보병연대와 제31서울 경비연대 - 인천으로부터 영등포까지의 접근로에는 인천으로부터 후퇴한 제18사단의 2개 연대 - 수원에는 편성중인 제70독립보병연대 이러한 조치 외에 전선사령부 산하 독립 공병대대에게는 인천-서울간 도로, 인천-수원간 도로상에 대인지뢰 및 대전차지뢰를 부설하라는 임무가 주어졌 다. 44) 두 번째로 최용건은 9월 15일, 16일에 내려진 전선사령부 후방지휘소(서울)의 병력 증강 조치들을 추인하면서, 서울 외곽으로부터 더 많은 부대들을 서울로 이동하도록 명했다. 이미 이동명령이 내려진 제25교육연대 이외에, 사리원에 있 던 제27교육연대와 4개의 전차연대(연대별 15대의 전차 보유)에게 서울로 이동 하라는 명령이 내려갔다. 그 4개의 전차연대는 진남포에 있었던 제41독립땅크 연대, 원산에 있었던 제44독립땅크연대, 해주에 있었던 제45독립땅크연대, 수원 에 있던 제46독립땅크연대들이었다. 45) 그러나 이 부대들은 서울로의 이동 중에 미 공군의 계속적인 폭격으로 인해 큰 손실이 발생했고 이동이 지연되었다. 9 월 18일까지 서울에 도착한 부대는 무기를 휴대하지 않은 채 철원으로부터 야 간 행군을 계속한 제25교육여단뿐이었다. 이 여단은 명령을 받은 지 3일 걸려 서울에 도착한 후 무기를 공급받기 위해 서울 동북쪽에 머물렀다. 46) 탱크부대 들은 기차로 이동 중에 손실을 입었으며, 포로심문에 의하면 최종적으로 인천- 서울, 그리고 서울 시가전에 참가하게 된 북한군 전차부대는 제42땅크연대, 제 43땅크연대 전부와 제44, 제45땅크연대의 일부, 그리고 후에 낙동강 전선으로부 43) Zhurnal, 1950년 9월 18일자; 라주바예프 보고서 제1권, 231~232쪽. 44) 주영복, 내가 겪은 조선전쟁 제1권, 502~503쪽. 45) Zhurnal, 1950년 9월 18일자. 46) 라주바예프 보고서 제1권, 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