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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84 군사연구 제130집 한다는 안을 이날 열린 정치위원회에서 제시한 후, 민족보위상과 전선사령관에게 9월 30일까지 사단 창설을 완료하라고 지시했다. 41) 그것이 김일성과 최고사령부의 독 자적 아이디어에 의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소련군사고문관의 조언에 입각한 것인지 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현실성이 없는 계획임에 틀림없었다. 단시일내에 15개의 사단 편성에 필요한 무기를 마련하고 훈련된 지휘관, 참모들, 군관들을 충 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두 가지 중대한 조치 외에 그는 이날 회 의에서 추가적으로 최고사령부 총참모부의 강화, 철도의 군사화, 남반부의 인민유 격대활동과 당단체 사업의 강화, 인민생활의 안정이라는 4가지 사항을 강조했다. 김일성의 최고사령부는 9월 17일 상륙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그 전모를 파악하 고 있었으나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북경의 중국측이 독 자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던 방책들 중 첫 번째 방책을 선택했다. 김일성은 9월 17일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지난 13일부터는 수백 척의 함선과 약 1,000대의 비행기, 5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대규모적인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길에 들어섰으 며 이미 인천에 상륙하였습니다. 미제침략자들의 기도는 인천과 서울, 원주 일대 를 장악함으로써 우리의 전선과 후방을 차단하고 전선의 북한군주력부대를 포위 소멸하여 단시일 내에 전조선을 강점하려는 것”이라고 전선 상황을 정치위원들에 게 알렸다. 4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낙동강으로부터 주력 사단들을 후퇴시킨다 는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다. 아직도 김일성의 뇌리에는 ‘부산을 향한 최후 공세’ 의 가능성이 어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용건에게 주어진 권한은 단지 후방에 있는 모든 부대들을 동원하여 인천-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라는 것이 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날 최용건은 서울에서 당-정-군 긴급 간부회의를 열고 인천과 서울의 방어를 일층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서해안방어사령관 최용건이 9월 17일 작전회의를 소집해 결정하고 9월 18일부 터 시행에 들어간 조치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 번째는 서울 지역에 있는 41) 김일성, 「급변하는 군사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몇 가지 과업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 위원회에서 한 결론 1950년 9월 17일), 김일성전집 제12권, 309쪽. 42) 위의 책, 308쪽. 9월 15일에 소련군 총참모부는 여러 첩보를 종합하여 상륙군의 규모가 상당한 것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김일성도 소련측의 정보를 통해 상륙군의 규모를 파악 하고 있었을 것이다. 9월 15일자 소련군 총참모부의 작전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물포 지역에서 미군 제10군단이 해안 상륙부대로써 상륙을 시행하였다. 이 군단 은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 영국군 ‘코만도’ 부대, 남조선 해병 구분대로 구성되었 다.” Zhurnal, 1950년 9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