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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83 이 무렵 북한군 지도부는 중요한 작전 전략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북경의 주은래가 판단한 바에 의하면 북한군에게는 대략 두 가지 방책의 선택 가능한 대 안이 있었다. 첫 번째 방책은 서울에 10만 명 정도의 충분한 병력이 있다면 주변 의 부대들을 끌어 모아 서울과 인천 방어에 투입하는 한편 낙동강 전선에서 방어 를 꾀함으로써 일단 인천에 상륙한 적을 격퇴한 후 낙동강 전선에서 다시 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이 방책은 다만 상륙부대와 대등하거나 우세한 후방 예비대를 가지고 있을 때만 성공 가능한 것이었다. 두 번째 방책은 낙동강에서 일부 부대 로 방어선을 축소하는 한편 주력 중의 몇 개 사단을 끌어올려 후방에 있는 예비 부대들과 결합해 인천-서울 지역에 투입함으로써 인천에 상륙한 미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그동안 신속히 낙동강전선의 주력부대를 철수시켜 지형적으로 유리한 지점에 방어선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주은래는 9월 18일 북경주재 소련대사 로쉰 을 통해 스탈린에게 북한이 인천상륙에 관한 정보들을 전해주지 않아 정확한 상 황에 기초할 수 없지만 9월 초까지의 낙동강 전선에서의 상황 전개에 대한 관찰 에 기초해 이같이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대안에 관한 중국의 시각을 제시하 며, 북한을 위해서는 후자의 방책이 현실적이라고 전달했다. 39) 인천상륙 이후 이틀간의 충격과 혼란 속에서 즉흥적으로 대처하던 인민군 최고 사령부는 인천상륙 이틀 후에야 인천과 서울 방어에 대한 얼마간 조직된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9월 17일에는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김일성은 인천과 서울 지 역 방어를 전담케 하고자 민족보위상 최용건을 사령관으로 하는 서해안방어사령부 를 구성했다. 40) 두 번째로 김일성은 앞으로 장기 항전을 전개할 예비 사단들을 창 설하는 계획을 입안하였다. 그는 전선사령부와 민족보위상이 책임지고 남한 지역에 서 동원한 인원으로 9개 사단을, 북한 지역에서 동원한 인원으로 6개 사단을 편성 39) 「로쉰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1950년 9월 18일), A. V. Torkunov, Zagadochinaia voina: Koreiskaia konflikt 1950~1953 godov (Moskva: ROSSPEN, 2000), pp.106~108. 원 출처는 AP RF, Fond 45, Opis 1, Delo 331, Ll. 123~126. 이 전문에 대해 그로미코 는 9월 20일 소련도 중국측과 견해를 같이 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같은 책, pp.108~109. 40) 자유와 독립을 위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 , 116쪽; 조국해방전쟁사 2 , 22쪽. 북한 공간사들은 일관되게 서해안방어사령부를 창설한 날짜를 기록하지 않고 숨겨왔다. 아마도 인천상륙에 대한 김일성의 때늦은 조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러나 소련자료들은 그 사령부가 창설된 것과 사령관으로 최용건이 임명된 것이 9월 17일이었음 을 명시하고 있다. Zhurnal, 1950년 9월 17일자; Voina v Koree 1950~1953, p. 125. 최용 건은 인천상륙 전야에 시찰차 서울의 전선사령부에 내려와 있다가 9월 17일에 서해안방 어사령관직에 임명되었을 것이다. 주영복, 내가 겪은 조선전쟁 제1권, 491~492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