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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82 군사연구 제130집 고 전시조건에 맞게 체신사업을 개선 강화할 대책에 대해 지시하고 있었는데, 그 회의에서 김일성이 결론을 맺으며 한 연설을 보면 인천상륙에 대한 아무런 언급 도 없었으며 또한 그러한 분위기조차 느낄 수 없다. 35)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 부대의 전모가 파악됨에 따라 북한군 지휘부는 9 월 16일부터는 긴급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날 북한군이 취한 조치는 철원에 있던 제25교육여단뿐만 아니라 원산으로부터 한 개의 독립연대를 서울로 전환하 여 서울 방어를 강화하게 한 것과, 포항 북쪽에 상륙한 적 부대에 대한 섬멸 임 무를 제2군집단(군단)사령관에게 지시한 것이었다. 오후 들어 소련군 감청부대는 9월 16일 19시부터 국군 제1군단, 제2군단이 인천 지역에 상륙한 부대들과 협동 을 위해 반격으로 전환하였으며, 미 제1기병사단은 이날 왜관을 점령하고, 국군 수도사단이 안강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36) 인천에서의 공격과 낙동강에 서의 반격이 동시에 시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낮의 인천에서의 전투 상황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제18사단의 일부 부대는 제42독립땅크연대의 전차 16대와 함께 인천 탈환작전에 나섰으나, 이날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의 전투에서 전 차 16대는 미군의 전차, 대전차포 팀, 그리고 항공기 공격을 받아 모두 파괴되고 불탔다. 제18사단의 한 개 연대는 미 제1해병연대의 공격을 받아 분산되어 소사 동쪽까지 밀려났다. 37) 또한 미 제5해병연대는 김포비행장 방향으로 공격을 계속 해왔고 비행장 외곽까지 도달했다. 인천 시내에서는 국군 제1해병연대가 저항하 는 북한군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인천이 UN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낙동강 전선에서의 상황은 당분간은 그렇게 비관적인 것은 아니었다. 미 제8군 은 9월 16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했으나 북한군 부대들은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진 지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대치하고 있는 전선에서 부분적으로 중요한 고지들 이 UN군 측에 빼앗기기도 하였지만 아직 그것은 작은 전술적인 의미를 갖는 손 실일 뿐이었다. 9월 17일까지도 북한군 제1군집단(군단)은 낙동강 동안의 교두보 를 확보하고 있었고, 제2군집단(군단)도 북부에서 이전의 산악진지 지대를 확보하 고 있었다. 38) 35) 김일성, 「전시조건에 맞게 체신사업을 개선강화할데 대하여」(1950년 9월 15일), 김일성 전집 제12권, 299~307쪽. 36) Zhurnal, 1950년 9월 16일자. 37) Zhurnal, 1950년 9월 17일자; Voina v Koree 1950~1953, p.123. 38) 자세한 전황은,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 (상), 437~4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