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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81 장 아몬드 소장이 지휘했으나 상륙작전 당일에는 맥아더가 직접 나서 부대의 작 전을 지켜보았다. 9월 13일과 14일에 순양함, 구축함이 함포사격으로 인천 항구를 초토화한 후 미 제1해병사단은 9월 15일 05시 30분부터 월미도에 대한 상륙을 전 개하여 이날 저녁까지 월미도, 인천항을 포함한 3개의 해안을 점령하고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인천의 비어수로로 진입하면서 몇 척의 함정이 북한군 포격을 받아 손상을 입었으나 곧 수리되었다. 미 해군은 상륙작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북한군의 부유 기뢰를 쉽게 찾아내어 모두 파괴해버렸다. 이미 미군의 인천 상륙이 뚜렷해진 9월 15일 새벽부터 서울의 전선사령부 참 모부(후방지휘소)에서는 바쁘게 대응책을 마련했다. 이날 소련군 총참모부에 보고 된 바 북한군이 취한 조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제18보병여단의 3개 대대를 7대의 땅크와 함께 서울에서 인천으로 보낼 것, 둘째, 수원지역에서 16대의 탱크를 가진 한 개의 독립연대[제70독립연대-필자]는 전투준비태세를 갖 출 것, 셋째, 사리원으로부터 한 개의 독립 보병연대[제78독립연대-필자]를 서울 로 전환할 것, 넷째, 철원으로부터 제25교육여단을 서울로 전환할 것(여단은 완전 히 장비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장비는 차량으로 서울로 보내졌음).” 31) 주간의 폭 격을 피해 제18여단의 1개 연대는 연대장의 인솔 하에 9월 15일 새벽 서울을 떠 나 인천으로 향했으나 소사에서 미군 항공기의 맹폭을 받아 연대의 병사 및 장교 들은 무기를 버리고 민간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뿔뿔이 흩어져 민간인 거주 지역 으로 숨어버렸다. 32) 인천에서는 이날 제64해안육전연대와 제18사단의 2개 대대가 상륙한 미군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지만 역부족으로 시내로부터 물러나고 말았 다. 33) 인천을 방어하던 제64육전연대는 다음날 인천 시가에서 국군 해병 제1연대 에 저항하며 전투를 벌였으나, “전원이 전사”했다고 보고되었다. 제107경비연대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뿔뿔이 흩어졌다. 34) 미군의 상륙이 이루어진 9월 15일 낮 김일성은 인천의 상황을 보고받지 못했 거나 아니면 보고받았다고 해도 상륙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짐작도 못한 채 상황 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 김일성은 내각 제26차 전원회의를 열 31) Zhurnal, 1950년 9월 15일자. 32) 라주바예프 보고서 제1권, 230쪽. 33) Zhurnal, 1950년 9월 15일자. 34) 라주바예프 보고서 제1권, 2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