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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80 군사연구 제130집 규모적인 대응은 없었다. 26) 그러나 실제로 서울의 인민군 전선사령부(후방지휘 소)는 인천에 미군이 8시간에 걸쳐 포격했다는 보고를 받고 이날 서울에 있던 제 18사단의 부대들을 인천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27) 이 명령에 따라 9월 14일 새벽 서울의 전선사령부는 제18보병사단 한 개 연대[제22연대-필자]를 서울에서 인천으로 보냈다. 28) 그러나 서울-인천 가도에서 이 부대들은 엄청난 미 공군의 폭격에 의해 예하 연대들이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고 결국 인천에는 도달하지 못 했다. 29) 9월 14일에도 인천 외항으로부터 미군의 대 함대가 함포 사격을 했으며 군산, 목포 지역에서 미군의 소규모 상륙 부대가 정찰을 시행했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인천의 현지 해안방어부대들은 “인천에서 적의 함대가 육전대를 상륙시키 고자 했지만 해안 방어부대의 화력에 의해 격퇴되었다”고 보고했다. 30) 그러나 인 민군 최고사령부나 전선사령부는 인천으로 추가적인 병력을 보내지는 않았다. 아 마도 아직 상륙부대의 규모는 알 수 없었고 그것은 소규모 상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Ⅲ. 인천상륙 이후의 북한군의 대응 그러나 9월 15일 실제로 상륙작전을 위해 동원된 미군 상륙부대들은 북한지도 부나 소련고문단이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순양함과 구축함 을 포함해 260척의 함선이 동원되었다. 상륙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 국군 제1해병 연대, 미 제7사단, 국군 제17연대 등으로 전투부대는 약 5만 명이었고, 지원부대 를 포함해 7만 5천 명을 헤아렸다. 이 방면에 동원된 화포의 숫자는 1,600문이었 고, 탱크의 숫자는 500대 이상이었다. 상륙을 지원하기 위해 500여 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고 매일 수백 소티의 항공 폭격이 이루어졌다. 상륙부대는 미 제10군단 26) 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 편, 육군본부 군사연구실 역, 한국전쟁 4: 인천상륙작전 (서울: 명성출판사, 1986), 124쪽; Walter Karig, Malcolm W. Cagle and Frank A. Mason, Battle Report: The War In Korea (New York: Rhinehart and Company, Inc., 1952), p.202. 27) Zhurnal, 1950년 9월 13일자. 28) 코로트코프, 스탈린과 김일성 제2권, 65쪽; 주영복, 내가 겪은 조선전쟁 제1권, 502쪽. 29) Voina v Koree 1950~1953, p.123. 30) Zhurnal, 1950년 9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