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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78 군사연구 제130집 원산에는 1개의 해안 육전여단, 그리고 진남포에 1개 육전여단이 배치되어 있었 다. 해군 육전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들은 8월 말부터 창설된 부대들로서 훈련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태반이 전투 장비를 보유하지 못했다. 20) 9월 공세가 9월 8일경 실패로 돌아간 후에도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다음의 ‘최 후공세’를 준비하기 위해 후방의 방어에 신경 쓸 수 없었다. 후방에 있던 ‘나남부 대’, ‘제98독립연대’들은 모두 낙동강의 전선부대의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서울을 통과하여 남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21) 인천에 미 제10군단을 지원하는 미 극동해군 함대가 모습을 드러내고 공격준 비를 위해 인천항에 대한 함포사격을 개시하기 시작한 것은 9월 13일부터였다. 그러나 미 극동군은 제10군단의 인천 상륙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키고 인천이 상 륙 지역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게 기만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 대한 사전 폭 격, 포격을 시행했다. 항공 폭격의 강도는 진남포, 인천, 군산 지역을 30:40:30으로 배분함으로써 인천이 특히, 두드러지지 않도록 했다. 항공 폭격은 서울, 수원 등 의 주변지역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도로와 철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항공 폭격 구역을 할당하고 조직적으로 폭격함으로써 인천을 고립시켰다. 월미도에는 9월 10, 11, 12일 수십 대의 항공기가 폭격을 퍼부어 불바다로 만들었다. 또한 일부 동해안에서 움직이는 함선들은 주문진, 삼척에 대한 대대적인 함포사격을 했다. 9월 12일∼14일 사이에는 군산, 목포, 포항 북쪽 등에 대한 소규모 특수부대를 상륙시 켜 정찰하게 함으로써 북한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고자 했다. 적이 상륙작전을 예 상은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상륙작전의 기획자인 미 극동군 작전부장 라 이트 준장은 상륙 이틀 전에 상륙작전은 기정사실로 하되, 그 시기가 10월 중이 될 것이라는 역선전을 흘려 신문기자들이 기사화하도록 하였다. 22) 인천과 그 주변지역에 대한 면밀한 정찰은 유진 클라크(Eugene Clark) 미 해 군 중위와 국군의 계인주 대령, KLO의 최규봉 대장이 이끄는 한․미 유격부대가 20) Voina v Koree 1950~1953, p.120; Zhurnal, 1950년 9월 15-30일자; 군사편찬연구소 역/ 편,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 (서울: 군사편찬연구소, 2001), 제 1권, 382~386쪽, 제2권, 35~36쪽. 이하 이 책은 라주바예프 보고서 로 축약 인용. 21) 「미 극동군 포로심문보고서」, No. 1555, 1556, 1557, 국사편찬위원회, 남북한관계사료집 제25권, 461~462, 463~464, 465~467쪽; 김광수, “인천상륙작전은 기습이 아니었는가?”, 전 사 제2호(1999), 247쪽. 이 두 개 부대들은 전선 투입을 위한 많은 예비부대들의 일부다. 22) 자세한 것은, 김광수, 위의 논문, 234~2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