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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77 2개 중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인천 지역의 방어진지에는 34개의 토치카가 준비되 었다. 진지공사는 40~50%만 이루어졌다. 해안으로부터 항구에 이르는 접근로에 는 접촉식 부유기뢰 26개가 설치되었다. 16) 인천항으로부터 강화도와 김포 해안 지대에는 제107경비연대가 해안을 경비하고 있었으나, 이 경비연대의 훈련이나 장비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이 연대에는 한 개의 포병대대가 배속되었다. 17) 전선지구경비사령부(후에 인천지구방어사령관) 예하의 다른 경비연대인 제106경 비연대는 8월 말에 홍성으로 이동하여 충청도해안의 방어를 책임지라는 명령을 받고 18) 그곳으로 옮겨갔다. 인천 후방의 내륙지역에는 잡다한 행정부대와 신편 부대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서울 지역에는 1개의 신편 전차연대가 있었고, 수원지역에는 창설 중에 있었던 제70독립보병연대, 그리고 1개의 독립전차연대가 있었으나 이들은 인천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서울 지역에는 서울 위수부대인 제18보병사단이 8월 말에 창설되어 신병 훈련 중에 있었다. 서울 시내에는 한 개의 철도관리대대와 제31서 울경비연대, 전선사령부 직속의 공병대대가 있었다. 공병대대를 제외한다면 이 부 대들은 전투부대라기보다는 행정 또는 경비부대였다. 19) 서울과 인천지역에 훈련 이 되지 않은 약 2만 명의 부대가 있었던 것이다. 서울 지역으로부터 좀 더 멀리 떨어진 외곽 지역들에는 8월 말부터 해안 방어 를 위해 신편 부대들이 창설되고 있었다. 철원에는 제25교육연대가, 그리고 개성 에는 제27교육연대가 새로 창설되어 부대는 훈련 중에 있었다. 사리원에는 제26 교육연대가 있었다. 해주, 진남포, 원산에는 각각 1개 전차연대(각각 전차 15~16 대 보유)들이 신편되어 배치되었다. 해주와 개성에는 편제상으로는 제17기계화사 단에 소속되었으나, 그중 제17땅크여단만이 9월공세에 참가하기 위해 8월 말에 안동으로 내려감에 따라 남아 있던 신편 제33보병연대와 제34보병연대가 있었다. 16) Ibid., p.120. 17) 전선지구 경비사령관 박훈일 참모장 백락칠, 「전투명령」No.105 (1950. 8. 31 서울에서). 이 제7포병대대는 강화 교동도, 김포, 인화리 3곳에 중대 규모로 배치되었다. 이 사료 출 처는 NARA, RG 242, Box 768, SA 2009, Box 7, 제107보련 참모부, 「상급명령서철」이며 이하 인용되는 박훈일의 명령서는 모두 동일함. 18) 전선지구 경비사령관 박훈일 참모장 백락칠, 「전투명령」No.100(1950. 8. 27 16:00 서울에서). 19) Voina v Koree 1950~1953, p.120. 공병부대에 관해서는 주영복, 내가 겪은 조선전쟁 (서울 : 고려원, 1991), 제1권, 5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