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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76 군사연구 제130집 상륙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예하부대들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11) 미 함정들이 퇴각하자 상륙위험이 제거되었다고 판단했다. 9월 13일에는 예하의 제32대대에게 대무의도, 용유도에 나가 섬에 있는 소규모 적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12) 9월 14일에는 “적이 우리 주의를 인천에 집중시키고 아산, 서산 방면과 강화도 김포- 부평계선에서 상륙을 실시할 가능성이 예견된다”고 말하며 그 방면의 방어를 강 화하라고 명령했다. 13) 상륙 하루 전에 월미도에 대한 폭격이 이루어진 것, 미 순 양함들이 인천에 대해 함포사격을 가하고 사라진 것 등을 적의 기만으로 보았던 것이다. 9월 14일 제107경비연대장은 상륙 규모도 별 것 아닌 것으로 판단해 오 히려 예하 부대들에게 주변의 섬에 흩어져 있는 적에 대해 토벌 계획을 세울 것 을 명령했다. 14) 적의 의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음은 틀림없다. 또한 인천 에 있던 부대들은 조만간 상륙작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예상했지만 차후에 벌어 질 정도로 그렇게 큰 규모의 상륙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다음날 상륙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예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적의 의도를 몰라 고민하다가 다음날 새벽 260여 척의 함정이 동원된 상륙공격을 받았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실제 전투를 수행할만한 강력한 부대를 후방에 마련하 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다. 북한의 작전문서들을 면밀히 검토한 소련의 연구는 “상황을 분석해 볼 때, 북한군 지휘부는 서해안 지역의 반상륙대책을 마련하는데 마땅히 돌려야 할 주의를 돌리지 않았고, 그 결과 북한군 부대들에 불리한 상황 을 초래케 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15) 인천 지역에 미군이 대규모로 상륙할 가능성에 대한 북한의 대비는 너무나 미 약했다. 이곳에는 1개의 해병연대가 76밀리 포 7문, 37밀리 고사포 6문과 약 3,000명의 병력을 가진 독립 보병연대가 서쪽 항구를 방어하고 있었다. 인천항과 제방으로 연결된 월미도에는 76밀리 포 3문, 37밀리 포 2문으로 증강된 해군 육전대 11) 제107보병련대장 최한 참모장 김영모, 「명령 No. 9」(1950. 9. 13 12:45 김포에서); 「명령 No. 14」(1950. 9. 14 17:00 김포에서). 이 문건의 사료 출처는 NARA, RG 242, Box 768, SA 2009, Box 7, 제107보병련대 참모부, 「하급명령서철」. 이하 인용되는 제107보병련대 장의 명령서는 모두 동일함. 12) 제107보병련대장 최한 참모장 김영모, 「명령 No. 10」(1950. 9. 13 김포에서). 13) 제107보병련대장 최한 참모장 김영모, 「명령 No. 11」(1950. 9. 14 20:00 김포에서). 14) 제107보병련대장 최한 참모장 김영모, 「명령 No. 12」(1950. 9. 14 김포에서). 15) S. S. Lototskii & N. L. Volkovskii(eds.), Voina v Koree 1950-1953 (Sankt-Petersburg: Poligon, 2000), p. 121. 이하 이 책은 Voina v Koree 1950-1953으로 축약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