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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75 공군과 해군의 엄청난 폭격과 포격이 계속되었다. 장학봉은 9월 15일 아침에 미 군의 엄청난 규모의 상륙작전이 이루어지는 지휘소에서 “전에는 예상도 할 수 없 는 광경들”을 멍하니 내려다만 보았다. 8) 인천상륙작전이 있기까지 북한의 전쟁지도상의 실책은 그들이 미군의 상륙 가 능성에 대해 전혀 대비하지 않았던 것이라기보다는 그 대비가 실질적이지 못했고 또한 너무 미약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들은 8월 중순부터 일본의 사가미 해안에 서 미군이 상륙작전 준비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나 9월 15일에 실제 시행된 작전과 같은 정도의 규모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그 시기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 없었다. 인천은 상륙 후보지 중 가능성이 높은 한 지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확실한 정보가 없던 북한군 내에서는 상륙 예상지점에 대한 다양한 추측 이 있었다. 금천 지역에 있었던 제27여단의 이철궁 중좌에 의하면 9월 초에 북한 군 고위군관들 사이에는 상륙 가능 지역으로 원산, 인천, 목포 등이 꼽히고 있었 다. 9) 위의 언급했던 장학봉의 진술에서 드러나듯이 9월 초에 인천방어여단장 리 청송 소장은 2개 대대 병력을 이끌고 군산항으로 갔다. 군산도 상륙 가능지점으 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인천지구방어사령관 박훈일은 예하 부대들에게 8월 말과 9월 9일에 각각 명령 을 내려 인천에 적이 상륙할 가능성이 있으니 강화된 토목화점들을 구축해 대비 할 것을 명령했지만, 막상 인천상륙 직전에는 특별한 경계 명령을 내리지 않았 다. 10) 다만 박훈일의 명령에 의해 예하의 부대들은 예성강 하구에서 금강 하구에 이르기까지 서해안 각 지역에 강화된 참호를 준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인천지 구방어사령부 예하에 소속되어 인천북쪽의 강화도와 김포의 방어를 맡고 있던 제 107연대장 최한은 9월 13일과 9월 14일 낮까지는 인천항과 월미도에 적의 계속된 항공공격과 적 함선 “10여 척”이 출현해 함포사격을 가하는 것으로 보아 인천에 8)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 (서울: 경인문화사, 2006), 579~580쪽. 9월 7일 경 여단장 리청송 소장이 군산으로 병력을 이끌고 내려갔다는 사실은 북한측이 인천이 꼭 상륙지점이라고 확신하지 못했음을 입증한다. 9) 제27여단 이철궁 중좌 포로 진술. Headquarters X Corps, "Operation Chromite"(15 August - 30 September 1950), p.28. 10) 전선지구경비사령관 박훈일 참모장 백락칠, 「전투명령」No. 106 (1950. 8. 31 서울에서); 인천지구 방어사령관 박훈일 참모장 백락칠, 「전투명령」No. 3 (1950. 8. 28 서울에서); 인천지구 방어사령관 박훈일, 「전투명령」No. 4 (1950. 9. 9. 서울에서). 이 명령들의 사료 출처는 NARA, RG 242, Box 768, SA 2009, Box 7, 「제107보연 참모부 상급명령서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