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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74 군사연구 제130집 없었던 것은 김일성과 북한군 수뇌부가 당시 상황을 냉정하게 저울질하지 못하고 ‘부산점령을 위한 최후공세’라는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집착한 결과였다. 그리고 본고는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한국전쟁 전반기 북한의 전쟁 수행연구” (경남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8)의 일부를 발췌, 수정한 것임을 밝혀 둔다. Ⅱ. 인천상륙 이전 북한의 인천 - 서울 방어와 상황 판단 김일성은 개전 초부터 크게 보아 두 번에 걸쳐서 미군의 후방 상륙에 대비했 다. 그것은 1950년 7월 말 그리고 8월 말이었다. 6) 그때마다 그는 미군의 후방상 륙 가능성을 말하면서 해안방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점령한 남한 지역뿐만 아 니라 한반도 전 해안에 대한 방어 강화 지시가 이루어졌고 충분치 못하나마 방어 강화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9월 초부터 작전의 우선권이 낙동강 전선에 두어졌고 해안방어 노력은 최고사령부의 고려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8월 하순에 김일성은 미군의 반격이 있을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상정하고 만약 상륙작전이 이루어진다면 여러 항구 중에서 인천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9월 초부터 15일까지는 낙동강선에서의 공세에 집착해 있었고, 모택동의 철수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천방어부대에는 상륙가능성 이 있으니 방어를 강화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북한군 수뇌부는 이곳에 병력을 증강하지는 않았다. 7) 당시 인천방어여단 문화부여단장이었던 장학봉의 회고는 그 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에 의하면 8월 말에 상부에서는 인천상륙이 있을 것 이라는 말들이 있었다. 그러나 9월 초에 상부에서는 인천방어강화를 위한 병력도 증강하지 않았고, 방어진지 공사도 물자 지원 부족으로 부실했다. 9월 초에는 여 단장 리청송 소장이 2개 대대의 병력을 이끌고 군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리청송 의 출발 이후 여단장 대리를 맡고 있었다. 인천과 월미도에는 수일간에 걸쳐 미 6) 김일성, 「지방방어를 조직할데 대하여」(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한 결론 1950년 7월 29일), 김일성전집 제12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5), 179~180쪽; 김일 성, 「후방을 튼튼히 보위하자」(내무성, 민족보위성 책임간부들, 도인민위원회 위원장 및 도내무부장협의회에서 한 연설 1950년 8월 29일」, 김일성전집 제12권, 248~251쪽. 7) Shu Guang Zhang, Mao's Military Romanticism: China and the Korean War, 1950~ 1953(Lawrence, Kansas: The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5), pp.72~73; 이상조-황용주 대담, “김일성은 모택동의 후퇴충고를 묵살했다”, 월간중앙 1990년 8월호, 292~2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