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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군사연구 제130집 73 9월 15일 일지에는 상륙 사실을 인정하면서 처음으로 북한측이 인천 지역에 병력을 집결시키는 조치를 취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9월 13일, 14일 양일간에 미 해․공군의 인천지역에 대한 폭격 및 포격, 군산과 목표 지역에 대한 해안 정찰 등이 신경을 곤두서게 했을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9월 14일까지는 어떤 본격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뒤에 자세하게 보게 되듯이 9월 13일에 제18사단 1개 연대를 내보낸 것은 상륙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지만, 그것은 ‘인천상륙’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기습은 확실한 것이었다. 또한 인천상륙 작 전 후 서울 점령까지의 13일간의 시간이 걸렸던 점은 미군의 작전 수행에 대한 세밀한 분석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이 두 가 지 문제는 서로 관련된 듯이 보이지만 사실상 별개의 문제였다. 이러한 사실 외에도 박명림은 인천상륙이 기습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왜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사단들이 포위상태에 빠졌으며, 왜 북한군 전체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붕괴되어갔는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기습이 아니고 북한군 수뇌부가 맥아더의 상륙작전의 기도를 미리 읽 고 있었다면 거기에 대비한 조치가 뒤따라야 했다. 그렇다면 인천상륙 이후 미 제10군단이 서울에 접근하기까지 10여 일 동안 북한군 지도부는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고 어떻게 작전을 지도했는가? 소련측과 중국측은 사태에 대해 어 떻게 반응했는가? 북한 지도부내에서 누구의 어떤 결정과 행동으로 인해 낙동강 방면의 북한군 주력을 UN군의 포위망 안에 빠지게 했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검 토되어야 북한군의 붕괴 배경이 제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인천상륙 작전 이전의 인천과 서울 지역에 대한 북한군의 방어 의 전모와 북한군 수뇌부의 전략판단, 인천상륙 이후 북한군 지도부의 작전적, 전 략적 지도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필자는 2006년에 쓴 한 논문에서 같은 문제 를 다룬 바 있지만 그 논문에서는 주제와 시간적 범위가 광범위했던 관계로 인천 상륙을 전후한 시기의 북한군의 작전적, 전략적 지도 문제를 심도 있게 분석할 수 없었다. 본 논문에서는 인천지역 북한군부대의 사료, 관련자 증언, 구 소련문 서들을 세밀하게 검토함으로써 UN군의 상륙작전에 대한 북한군 고위 지도부의 대응에 대해 사건을 보다 세밀하게 재구성하고, 이에 입각해 그들의 대응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간략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한이 인천상륙작전 에 대한 사전 대응에 실패하고, 상륙 이후 북한군 주력이 포위망에 빠질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