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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기 군사연구 제130집 365 아침 10시(1951. 11. 4) 서울역, 돌아온 피난민들이 열차에서 내린다. 나 도 떠밀리듯 광장으로 나온다. 군복 앞가슴에 상이군인 휘장을 달고 있다. 걷게는 됐지만, 왼쪽 눈엔 안대와 그 위에 자외선 차단 색안경을 썼다. 초겨울 추위, 행인과 지프들이 붐빈다. 역전에서 군고구마 100원 어치를 샀다. 따끈따끈하며 달고 맛있다. 이 얼마만의 맛인가. 할아버지 저 남대문 불탔군요? 빨갱이들이 불 질렀어. 오오라! 상이군인이군! 길 건너 세브란스 병원도 불타서 기둥만 남았다. 남대문 시장으로 가본다. 염색군복․장갑․양말․통조림 장사가 즐비하 다. 포장마차들, 음식 냄새와 김이 곳곳에 서린다. 돼지순대․소주․정종대 포․어묵․국수․튀김․김밥 …… 그런데 ‘꿀꿀이죽’이 특이하다. 미군부대 에서 흘러나온 밀가루․우유버터․소시지․햄 등을 석어서 끓인 것, 영양 이 만점이란다. 전쟁의 상흔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설렁탕 집 앞이다. 한 그릇에 350원이다. 안 되겠다. 포장마차로 간다. 머 리에 수건 두르고, 몸뻬에 앞치마, 연탄 풍로, 양은 냄비에 어묵과 꿀꿀이 죽이 끓는다. 아주머니! 꼬치와 죽 한 그릇 얼맙니까? 100원씩이요. 생전 처음 먹어보는 ‘꿀꿀이죽’이다. 참으로 맛있다. 오오! 상이군인 이 슈? 한 쪽 눈을 다쳤구먼! 죽 한 그릇과 꼬치 한 접시에 뜨거운 국물도 준 다. 이거 소주 한 잔 마셔 봐요. 추위가 풀릴 테니까. 젊은이들이 일선에서 얼마나 고생들 할까! 이 또한 얼마 만에 마셔보는 술인가! 온 몸이 녹는다. 이때 한국군 순찰 헌병 2명이 나의 어깨를 두들긴다. 제대했군요. 제대한 부대와 관등 성명을 말하시오. 제대증을 보이자 헌병들은 엄숙하게 경례한다. 고생 많으십니다. 저희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한 쪽 눈으로 볼 수 있어요. 오래간만에 내 고향 서울을 돌아보고 싶어요. 헌병들은 정중하게 경례하 고 사라진다. 이윽고 나는 퇴계로로 나섰다. 상이군인은 버스 승차시 무료다. 필동 1가 네거리에서 ‘나의 집’으로 들어간다. 오랜만에 귀가했다. 그런데 약간은 어 색하게 느껴진다. 생사고비를 넘긴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가 사 라진다.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