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page

수 기 군사연구 제130집 363 케 생명을 지켰으니 참 행운이다. 영남루(嶺南樓)가 아름다운 남천강(南川江) 건너, 창원(昌原)으로 가는 갈 림길을 지나 밀양농업학교로 후송되었다(1951. 2. 5). 제5육군병원이었다. 다음날 진료회의가 열렸다. “뇌진탕, 두 눈 각막망막 찰과, 흉곽타박, 늑골 골절, 우 무릎 탈골, 우 안면 파편관통, 우측 상하 치조골 파손, 손과 발 양 쪽 모두 1도 동상입니다. 뺨의 관통상은 봉합사를 뽑았습니다. 뇌진탕과 손․발 동상은 가벼운 편입니다. 무릎과 우하지(右下肢)는 접골, 재활치료 해야 합니다.” 불안감이 나도 모르게 엄습해 왔다. 과연 치료를 받고 온전한 몸으로 다 시 세상에 나아갈 수 있을까. 이제까지 행운의 여신은 나에게 항상 미소를 보내주지 않았던가. 스스로에게 자위한다. 10. 가톨릭 영세 받아 부대장인 병원장은 박태진 소령,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병동 끝에 성당 이 있고 수녀 한 분이 상주(常駐)하고 있었다. “이 하사님이죠? 나는 마리아 수녀입니다. 이야기 들었어요. 우유를 갖고 왔으니 마셔요.” 수녀는 스푼으로 한 술 한 술 떠서 입에 직접 넣어준다. 정말 천사는 바로 여기에 있구나. 전쟁터에도 인간의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날부터 수녀는 매일매일 우유를 먹여 주고 천주님께 기도했다. 벌써 입원한 반년이나 지났다. 목발을 짚고 걷게 될 정도로 회복이 빨랐다. 머리 붕대도 일부 풀었지만 양쪽 눈은 아직도 가리고 있었다. 답답한 순간도 있 었으나 삶에 대한 애착을 느끼는 나날이 더 많았다. 이것이 인지상정일까. 밀양 천주교 성당에서 내가 영세(領洗)를 받았다(51년 9월 둘째 주일). 환자 옷 을 그대로 입고서. 병원장 박태진 소령이 대부(代父)가 되어 주셨다. 영세성사(領 洗聖事) ‘아오스딩’라는 성인(聖人) 이름을 받았다. 천주교에 대한 귀의는 세상을 또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