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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에서 휴전까지 354 군사연구 제130집 1. 남침의 시작, 야밤에 서울 탈출 1945년 8월 15일은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 날이자, 우리는 혹독한 일 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감격스러운 광복절이다. 우리 고등학교 시절에 학도호 국단이 조직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고등학생 때부터 이미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받으며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20세가 되던 해인 1950년 4월 신촌에 소재한 연세대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6월에는 안암골 고려대학교와 예년처럼 서울운동장(현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축구경기장에서 친선경기가 벌어졌다. 1학년생인 나도 연 세대 응원단에 합류하여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신입생 새내기들의 함성은 서울 시내를 떠나갈 듯 우렁찼다. 한창 경기가 무르익을 무렵 난데없이 헌병과 경찰대가 들이닥쳤다. 이들은 다 급한 목소리로 확성기를 통하여 “38도선에서 인민군이 이미 내려왔다. 전쟁이다. 전쟁이 일어났다. 즉시 해산하라”라고 방송했다. 이들은 경기를 중단시키는 한편 강제 해산시켰다. 이것은 북한군이 일요일 새벽에 남침을 감행한 6․25전쟁의 소 식이었다. 군중에 의하여 이리저리 떠밀리다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미처 피난을 하 지 못한 상태에서 인민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에 진주하였다. 그런데도 정부 는 인민군의 무력 남침을 응징하기 위하여 국군은 북진을 하고 있다고 속였다. 인민군 진주와 동시에 피난길 통로인 한강인도교는 이미 폭파된 뒤였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공포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젊은이들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의용군으로 강제 모집도 서슴지 않았다. 이를 기피하거나 도망 치는 경우에는 엄청난 곤욕을 치루었다. 낮에는 무고한 시민을 끌어다가 인민재 판을 한 후 야간에 사형시키는 총성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광란과 공포의 도 가니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효자동에 있는 누이 집으로 도피했다. 고종사촌형도 이미 와 있었다. 다음 날 누이가 밖으로 나갔다가 오더니 매우 당황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주요 내용은 “여기도 인민군이 집집마다 뒤져댄다.”라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형과 나는 외가집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다. 인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