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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가지 군적을 겪으며 6․25전쟁에 참전했다 350 군사연구 제130집 5. 읽어버린 그 사람 기다렸으나 유격전은 주전선의 정규전 하고는 그 열도가 정반대라고 한다. 주전선이 소강 상태로 지구전 양상을 띠게 되자 공산군은 1953년도에 서해지구 반공유격대에 대 한 압박을 가중해 왔다. 또한 유격부대는 작전의 이니셔티브를 지니고 공격활동 을 전개할 때는 신출귀몰의 전과를 올리지만, 그 반대로 수세에 몰려 적의 토벌 에 시달리게 되면 ‘작은 전과에 큰 손실’을 감수하게 된다. 따라서 작전․공작은 대폭 자제되었으며 나는 부대원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기에 신경을 썼다. 더구나 그해 여름에 들어 판문점 정전회담이 뚜렷한 진전을 보여줄 듯이 변화 됨에 따라 유격대원들의 의식과 사기에는 고뇌와 혼란의 기미가 역력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휴전이 되는 경우 남한에서 태어났거나 남한 땅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 은 일단 안주의 땅을 얻게 되지만 유격대원들처럼 북한 땅에 연고지를 가진 실향 민들은 그야말로 고향을 잃어버리는 ‘실향민’이 되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혈기 방장한 대원들 가운데는 휴전이 성립되는 경우 남한지역으로 철수할 것이 아니라 제8240부대에서 이탈하여 북한지역에서 최후까지 싸워 옥쇄 할 결의까지도 비장하게 간직해 보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래도 시간이 감에 따라 ‘옥쇄 회의론’으로 차츰 기울어 갔던 것이었다. 거기다가 또 하나 나 자신에게는 사사로운 통한비사(痛恨秘事)가 있어 최후 결 심을 혼란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젊은 날의 순정과 이성적 꿈을 더불어 간직했 던 한 여성을 어이없게 잃어버린 슬픈 사연이었다. 그 이름의 머리글자를 J로 시작하던 그녀는 ‘모나리자’의 초상을 방불케 하는 용모에다가 학업성적과 스포츠 및 소녀로서의 공덕심이 뛰어나서 여중․고교의 학생회장을 지낸 재원이었다. 그러므로 나와의 연사(戀事)를 아는 주변사람들은 우리 둘의 만남을 한결같이 부러워했으며 그녀의 부모님도 대충 짐작하고 2~3 년이 지나면 결정적 혼사를 맺어줄 생각을 은근히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나이 19세이던 그해 겨울, 우리들이 구월산으로 입산하는 길목 에서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입산로를 서로 다르게 잡은 것이 화근이 되어 입산 중도에서 J양 일행은 하산 중이던 공비 무리들에게 붙잡혀서 행로 미상의 곳으로 끌려갔으며, 나를 비롯한 청년투쟁 재열은 공비일행과 격전을 벌이는 바람에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