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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기 군사연구 제130집 349 은 이야기’ 몇 가지를 기록해 두기로 하겠다. 구월산맥의 동쪽면에는 용진․초리 두 면에 걸쳐 있는 큰 저수지가 있다. 그 저수지 덕분으로 신천군과 안악군에 걸쳐서 어로리평야를 이루고 있으며 그 평야 의 연간 전답 소출은 약 5만 톤이었다. 문제는 구월산 저수지의 수문을 파괴하고 제방을 무너뜨림으로써 큰 홍수를 유도하여 농산물 5만 톤 피해를 공산측에서 강 요하느냐 방임하느냐의 문제였다. 수문 폭파, 제방 붕괴 작전 여부를 놓고 우리유 격대 참모진 내부에 의견이 갈렸다. 참모장인 나는 인사․정보․작전․군수․네 참모진에 나까지 포함해서 5인 참 모의 다수결에 의지하기로 했다. 가위․바위․보의 결과는 정보․작전 두 참모는 파괴 결단을 탁하였고 인사․군수 두 참모는 파괴 반대인 온존 유지를 택해 2 대 2 동률이 되었다. 이제 남은 결판은 1표를 던질 나의 결단에 달렸는데 나는 심사 숙고 끝에 ‘저수지 폭파 반대’ 쪽에 표를 던져 저수지 현상유지에 답을 잡았다. 어로리평야의 대홍수는 무단파괴를 반대하는 ‘이지파’에 의해서 온전화되었고 공 산측과 그쪽 농군들은 양곡 5만 톤의 소득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섯 참모들의 가위․바위․보 선택에서 최종결정권자로 ‘파괴반대’를 택했던 일을 지 금도 잘했던 일이라고 자위하고 있다. 안악군 용순면 장산리 구장동에 있던 최해원 군의 넓은 가택이 유엔 공군의 폭격을 받지 않은 것도 나와 정보참모의 속 깊은 배려 덕분이었다. 최 군은 나와 안악중학교 동창이었고 그의 5세 맏이 형은 바이올린을, 둘째 형은 서양화를 전 공했으며 막내 해원 군은 현대무용을 좋아한 3형제 예술가계였다. 집안 형편이 2 천 석 가량의 중농이므로 가옥 울타리는 밤나무, 대추나무, 은행나무, 사과나무, 무궁화로 둘러쳐진 아담한 집이었다. 그런데 공산군 제23여단 본부는 이 가택을 접수한 다음 위장장치를 꾸미지 않았으므로 공산부대 위장소라는 정보를 제공하 지 않았다. 그 덕에 내 다정한 친구의 가택은 만 2년 동안이나 공산군 부대 여단 본부로 쓰이면서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동급생인 최해원 군은 슬그머 니 월남해 한국군 해병대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치고 지금은 예비역 해병중령 으로서 노후를 보람 있게 보내고 있다. 예술을 좋아하는 세 형제가 전쟁 통에도 가옥이 손상을 입지 않았기를 지금도 은근히 기도하고 있다. 우리가 공중폭격 목 표로 지정하지 않았던 것을 지금도 잘 했던 일이라고 추억하고 있다. 비록 60년 전의 선행이었다고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