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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가지 군적을 겪으며 6․25전쟁에 참전했다 344 군사연구 제130집 4대 사령관 댄도 소령 등은 D-10 안악유격대야말로 전형적인 게릴라부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 포상으로서 특별 보너스를 여러 번 지급해 주었다. 하지만 부대의 수난도 적지 않았다. 1951년 10월 하순에 북한군과 중공군의 합 동부대 1개 여단이 구월산 대토벌을 진행함에 따라 우리는 내륙 CP가 유린되고 통신시설이 파괴되는 큰 수난을 겪었다. 이 수난의 경우 우리 공작원이 공산토벌 대의 중요간부이던 박치록 북한군 대위와 미리 상통하는 바람에 토벌대 기밀을 입수하여 피해가 제한적이었던 기록을 남겼다. 해가 바뀐 1952년 봄에는 김유성 부대장과 원용서 참모장이 공작용 선박을 취 득하여 작전기지로 귀환하던 중도에 큰 풍랑을 만나 해난사고를 당하였으며 종당 에는 부대장(김유성), 참모장(원용서) 양인이 공산군에게 생포되는 불행을 겪었다. 우리 부대에서는 고위급 지휘자의 구출을 위해 안간힘을 다하였으나 구출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부대 본부에서는 부대장과 참모장을 동시에 잃었으므로 큰 타격을 받았으며 부대 지휘본부의 보충으로서 홍석우 부관이 부대장에 오르고, 또 한편 이경남(본 인) 작전참모가 참모장 직을 맡게 되었다. 이 수난사건은 우리 유격대의 3년 역 사에 있어 가장 크고 가슴 아픈 사고로 기록되었다. 이같은 시련과 불상사를 당하여 지휘관급 인사개편의 연장선상에서 참모장 이 된 나는 정보․작전․공작을 총지휘하게 되었고 연세가 좀 많은 부대장은 주로 인사와 보급부문을 전담하게 되었다. 당년 24세인 내가 작전․공작 부문 을 총괄함에 따라서 유격대는 한결 젊은 기색으로 개편되었으며 활기가 넘쳐 났다. 2. 금성충무훈장 받은 九月山 호랑이 나는 1952년의 유격전을 파라슈트(낙하산 투하)로 구월산에 진입하고 핵심적인 보급품도 공중투하 하는 공지 협동작전으로 전환했다. 다행히 백령도 기지사령부 의 다이 사령관이 나를 깊이 신임하고 나의 요구조건을 거의 수용해 주었으므로 일은 잘 풀려 나갔다. 1952년 봄에 시작된 파라슈트에 의한 구월산 진입 특공대 의 제1진은 김정식, 김승두, 이봉준, 임명실, 전로봉, 이 앙드레 등 6명이었는데 그로부터 거의 60년이 지난 오늘의 후일담으로서 김승두, 이봉준 두 용사가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