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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기 군사연구 제130집 343 23세의 약관이었는데 부대장과 참모장이 이구동성으로 나를 작전참모로 천거했 다. 내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사양했으나 두 분은 입을 맞춰서 “한국군이건 인민 군이건 장교․군관 경력자는 이경남 씨가 유일한 몸이므로 작전참모를 맡아야 한 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내가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작전참모 자리를 수 락하면서 혼자 속내로 청산리대첩에서 전공을 세웠을 때의 이범석 장군의 당시 나이가 20대 약관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김일성이 빨치산에 투신했던 나이가 그 무렵이었음을 떠올리면서 실소 아닌 실소를 머금었었다. 우리 안악자유무장대가 해주와 신천을 에돌아서 웅진반도 연안도서로 빠져나 가자 한국 해군 소해정 한 척이 다가와서 백령도에 미8군 정보처의 전방활동기지 가 설치되어 있으며 대북공작을 위해서 북한 출신 반공무장대를 규합 중이라고 친절히 일러주는 것이었다. 안악자유무장대는 그 제보에 지체 없이 호응하여 1951년 3월에 그 사령부를 방문하여 사령관 버크 소령과 혐의한 다음 동키부대 제10연대로 참여케 되었다. D-10연대 혹은 ‘당나귀 10’이라는 암호 호칭을 받은 우리 부대의 정식 호칭은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KLO) 제8240부대 레오파트(豹)기지수령부 구월산유격 대 D-10 안악부대’ 라는 긴 명칭을 지녔었다. 구월산 오봉(五峰)에 부대본부를 설치한 우리 유격대의 작전구역은 산맥 능선 의 동부지역인 안악, 신천, 재령, 봉산, 사리원 등 내륙지대였다. 병력은 한때 5백 여 명에 육박하여 정규 대대병력에 근접하여 초도, 상취라도․피도 등 도서에 후 방 지원기지를 설치하여 운영하였고 특히 대동강 입구의 남포항(南浦港)을 제압 봉쇄했다. 이로써 공산군은 6․25전쟁 기간 중에 남포 항구를 전혀 활용하지 못 했던 것이다. 우리의 주요작전은 습격, 파괴, 절단, 방화, 노획, 적군생포, 전단살포, 적정수집, 폭격유도, 추락비행사 구출, 수문폭파, 피난민 구출, 가축노획, 총기노획, 구금자 구출, 선박노획, 위폐살포, 해난사고 구출 등 매우 다양했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공작을 수행하다 보니 그 종류에 있어서는 좌익 공산계의 지리산 빨치산보다도 훨씬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백령도 표기지사령부는 적지 내륙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D-10 안악자유유격부대를 높이 평가했으며 내가 작전참모 혹은 참모장 신분으로 2개 월에 한 번씩 사령부에 출두하면 2대 사령관 무킨 중령, 3대 사령관 다이 소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