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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가지 군적을 겪으며 6․25전쟁에 참전했다 342 군사연구 제130집 자들은 12월 6일 아침에 긴급 회동하여 ‘안악지구 방위사령부’를 구성했다. ‘향토 사수’를 다짐하는 임시기구였으며 청년단장인 나는 정보처장을 맡았다. ‘결사항전’ 의 비장미가 넘쳐흘렀다. 그런데 어찌 뜻하였으랴. 회의를 마치고 주민들에게 알리는 ‘포고문’을 거리 요 소요소에 게시하고 있던 정오 무렵에 유엔 공군 무스탕 전투기 4대가 안악읍 상 공에 나타나더니 맹렬한 기총소사와 네이팜탄 투하를 감행한 것이다. 거리에 불 길이 치솟고 적지 않은 사상자가 생겼다. 우군 항공기를 향하여 반갑게 손을 흔 들던 주민들은 혼비백산 반공호로 뛰어들었다. 나는 유엔항공기의 무차별 공습이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 다. 하나는 이 고을(안악군)이 유엔군의 작전상 이미 적성지역으로 포기되었음을 의미하는 확증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살고 싶으면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남 쪽으로 피난 가도록 독촉하는 신호”라고 해석되었다. 아무튼 유엔 전투기의 공습으로 고을 주민들은 패닉(공황)상태에 빠졌으며 ‘향 토사수’를 다짐한 제방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 고장의 수복시기였던 ‘자유해방 50일’에 서글픈 조종(弔鐘)이 울린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간단 말인가? 향토사수를 외치다가 장렬히 산화할 마지막 길이 있다. 걸음아 날 살려다오라고 외치면서 남쪽으로 피난 가는 길이 있다. 그 러나 나의 경우는 그 두 가지 선택지에 가위표를 하고 구월산 입산을 선택했다. 내 어린 시절부터 꿈과 정서를 아련하게 가꿔 준 구월산에 들어가서 자유의 불씨 를 지피고 전파하는 반공 빨치산으로 거듭나는 레지스탕스의 길을 두려움 없이 의연히 선택한 것이다. Ⅲ. 자유의 불씨 九月山에 지피고 1. 구월산 유격대 작전참모를 맡아 1․4후퇴의 남하 과정에서 안악경찰대, 특경대, 청년단, 학도대 등의 3백여 명 이 규합하여 ‘안악자유무장대’라는 단일부대로 재편되었다. 부대장은 김유성이라 는 40대의 장년이었고, 참모장은 30대 후반의 원용서 중년이었다. 그때 나는 당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