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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기 군사연구 제130집 341 더구나 그 무렵은 아직 중공군의 참전 이전이었으므로 통일 성취가 눈앞에 온 듯한 분위기였다. 바야흐로 북한 전역을 탈환하여 통일을 설계하는 그러한 분위 기가 눈앞에 온 듯 했던 것이다. 각자가 제 고향 꿈에 몰두했다. 그러므로 나는 임부택 연대장에게 정보문관 사임을 청원하였으며 임 연대장은 김종오 사단장의 허락을 받아 나에게 귀향증을 마련해 주었다. 고향에 돌아 갈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나는 좋은 의미의 사이비 개선장교였다. 2. 향토 재건사업에 몰두했으나 고향(安岳)의 청년․학생 동지들은 나를 뜨겁게 환영하여 대한 청년당 안악읍 단장에 만장일치로 선출해 주었다. 공산도당이 쫓겨난 수복지역에서 청년단을 비 롯한 자치단체들의 할 일은 참으로 많았다. 더구나 권력과 행정의 공백상태인 수 복지역에서는 우리가 할 일로 우선 고을의 치안유지가 급선무였으며, 주민생활에 영향이 큰 매점매석의 단속과 장마당의 복원 및 식생활의 젖줄인 식수를 확보하 는 사업 등이 손꼽혔다. 임시 중단된 초․중등학교의 개교 준비, 잠복중인 극렬 빨갱이의 색출, 본의 아니게 노동당에 가세했던 온건 좌익 인사들의 심사와 신원 보증, 통일의 날 이후를 대비하는 사회단체의 조직 준비, 그리고 구월산 일대에서 준동하는 공산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 등등이 시급한 과제였다. 특히 밝혀둘 것은 수복지역에 한국정부의 관리나 경찰관의 파견이 없었으며 한국군이나 유엔군 부대의 장기 주둔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훗날 북한공산집단이 유엔군의 북한 진주 당시 유엔군의 약탈, 강간, 살인 등 잔학행위가 많았다고 선 전했으나 그것은 새빨간 거짓 선전일 따름이며 적반하장의 전형이었다. 또 하나 특기해 둘 사례는 조만식 선생이 창당했던 조선민주당의 지방 간부들 이 고당선생이 연금된 공산치하에서도 반공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있다가 우리 청년단의 치안사업에 적극 협조한 긍정적 자세였다. 또 한 가지는 구월산의 공 산 빨치산 가운데 이탈, 하산, 귀순, 투항자가 날로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청년단장으로서 당년 22세의 내가 지향하는 향토재건사업은 엄청난 역 풍에 직면했다. 소위 ‘똥뙤놈’이라는 중공군 30만 대군이 한국전쟁에 불법 개입하 여 유엔군을 압박함에 따라 전선은 크게 요동쳤다. 마침내는 유엔군의 평양 포기 와 38도선 이남까지의 전면철수로 이어진 것이다. 최전선의 대변화는 내 고향 같은 시골에도 충격파를 주어 우리 자치단체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