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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가지 군적을 겪으며 6․25전쟁에 참전했다 340 군사연구 제130집 노동당원 여섯 명을 빼돌리고 나머지 소대원 43명 전체가 넘어왔으니 참으로 예 술적 귀순 성공이오!” 이렇게 치하하는 김종오 사단장은 나처럼 작은 체구였으나 미소 띤 얼굴과 어 깨에 달린 별 하나 장군 표지가 가을 아침 햇살을 받고 반짝거렸다. 김동명 정보 참모가 기념 촬영의 셔터를 눌렀다.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Ⅱ. 정보문관에서 청년단장으로 1. 귀향증 얻어 고향으로 38교를 무난히 건넌 7연대가 화천 탈환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나는 정보참모의 보좌역으로 종군했다. 그런데 화천작전이 신속히 끝나자 뜻밖에도 우리 귀순 소 대원들을 포로수용소로 후송한다는 것이 아닌가. 미군 고문관이 제네바 협정 조 문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나는 거세게 반발했다. “김일성 도당과 싸우려고 귀순한 우리들인데 어째서 포 로란 말인가? 끝내 포로로 간주한다면 모두가 자결하고 말테요!” 나는 이렇게 외 치고 항의표시로 단식을 선언했다. 소대원들은 어리둥절하여 수심에 빠졌다. 하지 만 전쟁터에서의 군법, 군율은 지엄하기 때문에 임부택 연대장은 난삽한 표정으 로 고민하다가 ‘솔로몬의 해법’을 찾은 듯이 나를 북진작전 수행상 필수요건이라 고 사단본부에 건의하여 ‘연대 정보 문관’으로 돌려놓은 다음, 나머지 귀순 소대 원 42명은 포로수용소로 후송 처리했다. 그들의 후송 차량을 배웅하면서 나는 통 곡했다. 기막힌 이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후일담에 속하는 일이지만 귀순사병 42명은 훗날 반공포로 석방조치 때 대부분이 자유의 몸이 되어 남한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활로를 찾게 되었다. 제6사단의 북진 작전에 따라 정보문관인 나도 당연히 동행했다. 화천, 철원, 평 강, 회양군을 수복하는 진격로에서 나는 정보문관으로서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 었다. 그곳은 강원도의 북부 지역이었다. 그러나 제7연대가 평안남도 권역에 진입 함에 따라 그 지방 지리와 인문․풍속에 어두운 나는 차츰 무용지물이 되어 갔 다. 평안도 사투리도 난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