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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기 군사연구 제130집 337 교가 유엔 공군의 공격목표가 되면서 특히 주간에는 치열한 폭격을 받는 바람에 제대로 된 교육 훈련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나의 경우 이 속성과 훈련과정에 수용되었으나 유엔군의 공습이 심해서 실제 훈련은 야간에만 조금 진행되었으며 부대전투훈련은 생략된 채 무기를 다루는 화 기학(火器學) 위주로 진행되었다. 아무튼 속성과 1개월 기간의 교육을 마치게 되자 8월 초순에 졸업식을 거행하 게 되었으며 나는 마침내 인민군 군관으로 임관되어 육군 소위의 계급장을 붙이 게 되었다. 부대 소속은 인민군 제26여단 중화기 3대대 제1중대의 제3소대장으로 임명되 었다. 부대의 위치는 황해도 평산군의 남천(南川)이었으며 거기에서 사병들을 배 속받으니 소대 전원이 나를 포함해서 49명이 되었다. 당시 낙동강 전선은 피아간 일진일퇴의 사투를 거듭하고 있었으며, 남천에서 신설된 제26여단은 방어전투훈련에 치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위급 군관들이 “왜 공격전투훈련이 아닌 방어전투훈련에만 치중하느냐?”라고 의아해 했더니 문 화부 대대장이라는 사람이 빙그레 웃으면서 “이제 곧 우리 인민군이 부산까지 해 방시킬 테니까. 그때에는 공격보다도 해안선 방어가 중요하지 않겠는가!”라고 대 꾸하는 것이었다. 소박하게 들으면 맞는 말 같았다. 그런데 9월 15일경에 날벼락 같은 소리가 들렸다. 미국 맥아더 원수가 지휘하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공산군은 졸지에 수세에 몰렸다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했다는 그 다음날 내가 속해 있는 인민군 제26여 단에 대해서 이동 행군명령이 내려졌다. 황해도 남천에서 행군을 시작하여 강원 도 지방으로 이동하는 행군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행선지는 분명치 않으나 철원 - 평강 - 인제 - 화천 - 춘천 방향으로 이동하는 길목이었다. 마침내 행군의 끝 지점인 화천에서 춘천으로 이어지는 행로의 중간지점인 ‘모진교’ 라는 교량에 도 달했다. 그 다리를 모진교(毛津橋) 혹은 모진교(母津橋)라고 불렀으나 그 다리가 북위 38도선 선상에 위치하므로 ‘38교’ 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나는 이 38교 방어임무로 최전방에 배치된 데 대하여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 도 그럴 것이 일정 말기에 학병으로 끌려 나간 우리 한국인 대학생들이 중국 전 선에서 국부군(國府軍)이나 팔로군(八路軍)과 마주하게 되면 탈출을 감행하여 임 시정부․광복군에게 귀순했던 고사를 떠올리니 이제 한국군과 육안으로 마주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