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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가지 군적을 겪으며 6․25전쟁에 참전했다 336 군사연구 제130집 벌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입대지원서에 서명 제출했다. 분위기는 광기(狂氣)의 도가니 같았다. 조선노동당 중앙에서 나왔다는 대회 감독자는 격려사에서 이제 대학생들이 곧 바로 군대에 입대하면 자동적으로 군관(장교)으로 임관된다고 말하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여름방학 이전에 야외훈련을 위해 1개월 간 대기한다고 했던 말은 바로 이날을 위한 준비 계략이었던 것이다. 궐기대회가 광기를 띠고 야단법석을 벌이므로 나는 마치 빈대벌레를 씹은 듯 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하숙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나의 위축된 무력감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충격파가 평양 하늘을 진감(震 撼)시켰다. 난생 처음 보는 미군 쌕쌔기(제트) 전투기와 B26 폭격기 편대가 평양 공습을 감행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다. 나는 미군 항공기들에 대하여 두렵다기보다는 오히려 “잘한다!” 라는 통쾌감을 느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세계 최강인 미군이 참전했으니 전세는 곧 반전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몸을 숨겨 때를 기다리면 되겠군!” 나는 이렇게 마음을 반전시키고 지체 없이 평양을 벗어나기로 했다. 이리하여 나는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기슭의 고향마을로 은신처를 찾았다. 몇몇 집안 식구 이외는 전혀 모를 골방을 선택했으며 일과라고는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일이었 다. 미군과 한국군이 조만간 북진해 올 것 같은 희망으로 가슴을 부풀렸다. 그러 나 은신생활의 안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평양 학교당국으로부터 인민군 입대 기 피․이탈자 명단을 통첩 받은 내무서와 민청에서 해당기피자를 수소문하기에 야 단법석을 떤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 나는 은신처에 더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내무서원과 민 청 간부들이 우리 집을 자주 찾아와서 어디에 숨어 있는지 고백하도록 자꾸 다그 치는 바람에 더 이상 숨어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나는 마침내 결심했다. 내가 숨는 바람에 남은 식구들이 시달림을 당하느니보다 는 적극적 처신을 택하여 운명의 벽에 부딪쳐 보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곧 평양으로 가서 대학당국에 출두하였더니 대학민청위원장의 질책성 훈계에 이어 평양 교외 사동(寺洞)에 있는 인민군 ‘제2군관학교’에 보내졌다. 이 군사학교는 일제치하에 이른바 ‘아끼오쯔(秋乙)’ 부대라고 호칭되었으며 8․15 이 후에는 인민군의 군관 양성을 위한 속성과정으로 꼽혀 왔었다. 그런데 이 군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