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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시 다국적군으로서 한국군의 역할 및 향후 과제 322 군사연구 제130집 로, 국방시설의 방위와 보수를 담당했다. 그 수는 1968년까지 합계 32만 명 정도 였고 베트남전쟁 전체 기간을 통해 약 1,100명의 희생자를 냈다. 한편, 소련은 1965년 4월 이후, 지대공 미사일 조작요원을 중심으로 가장 많을 때는 약 500명, 1965년부터 1974년 말까지 합계 6,359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13명의 희생자를 냈 다. 55) 북한의 지원사항에 대한 공개된 자료는 매우 제한된다. 북한은 1966년 10 월과 1967년 초에 하노이 방어부대인 북베트남군 제921․923 폭발물처리부대에 소수의 처리반을 파병했다. 그리고 1968년까지 200명의 조종사가 복무했다. 추가 적으로 적어도 2개의 지대공 고사포연대를 파병했고, 무기 및 탄약, 2백만 벌의 군복을 지원했다. 또한 김일성은 파병 시 조종사들에게 ‘베트남 영공을 북한의 영 공처럼 간주하고 싸울 것’을 독려했다. 56) 넷째,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주둔지역에서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활동에 대해 사료수집과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1997년 실현된 베트남전 쟁 시대의 미국과 베트남 고위관리에 의한 전쟁사 검증을 위한 대화이다. 즉, 1997년 6월 2일부터 4일간 미국의 전 국방장관 맥나라마의 제창으로 이루어진 ‘하노이 대화’이다. 57) 당시 전쟁 수행과정과 평화협상에 참여했던 미국과 베트남 측 인사 각 13명이 베트남전쟁 수행과정에서의 제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이다. 현재 베트남과의 외교관계를 고려 시 가능하다고 본다. 동아시아의 중국과 일본, 한국은 중․일 전쟁, 한․일 합방 등 제반 역사문제에 대해 공동 학술연구를 통해 상호 역사인식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반세기가 지나고 베트남 전쟁 파병 50주년이 되는 2014년을 앞두고 공동 관심사에 대한 선행연구와 비공개 자료의 상호 공개 및 교환 등을 통해 역사연구를 할 필요성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다섯째, 전쟁의 뒤안길에는 늘 승자의 영웅과 음지의 영웅이 존재한다. 전쟁 후 유증의 상처 또한 국가발전에 기여했다는 명분에 묻혀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55) 후루타 모토오․박홍영 譯, 『역사속의 베트남전쟁』, 일조각, 2007, p.230. 베트남 전쟁시 중국의 지원에 관한 내용은 이한우, 「베트남전쟁시 중국의 북베트남 지원과 양국관계, 1950~1975」,『베트남전쟁 연구 총서』제3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pp.159∼198; 소련의 지원에 관한 내용은 오그네또프,「소련과 베트남전쟁」,『동아시아 전쟁사 최근연 구 논문선집』,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7, pp.423∼458.을 참조 56) http://en.wikipedia.org/wiki/Vietnam_War. 2009. 10. 28, 검색 57) 히가시 다이시쿠․신순주 譯,『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미국․베트남 적과의 대화), 역사넷, 2004,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