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page

베트남전쟁시 다국적군으로서 한국군의 역할 및 향후 과제 318 군사연구 제130집 대해 많은 의구심을 낳고 있다. 43) 결국 제2의 베트남전쟁, 제3의 베트남전쟁이라 는 인식이 팽배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제2장에서 살펴보았던 한미동맹의 차원에 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은 앞으로 해외파병시 명분과 국가이익에 대해 어떠한 방향으로 접근할 것인가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제는 단순히 한미동맹의 차원이 아닌 세계평화의 한 축을 담당할 글로벌적인 위치에서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지도부의 역할과 기능에도 유념해야 한다. 즉 정치가의 전쟁지도와 군부의 전쟁지휘와의 갈등에 대해서도 더욱 연구가 필요하다. 44) 단순히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는 고전적 관념에서 접근함으로써 군사적 승리를 전쟁의 승리 로 연결하지 못했다. 1968년 뗏 공세 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많은 손실을 입 었다. 만약 미군이 1969년 닉슨독트린에 의해 철수하지 않았다면 결정적 승리가 가능했으며, 북베트남군은 1969년과 1970년에 가장 고통스러운 기간이었다. 45) 그 리고 닉슨 또한 그의 회고록에서 1968년 11월 1일에 북폭을 중지하지 않고 하이 퐁항에 기뢰를 부설했다면 전쟁은 1973년이 아닌 1969년에 끝낼 수 있었다고 했 다. 46) 또한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 맥나라마의 계량화된 전쟁지도 책임을 주시해 야 한다. 즉 전쟁기간 중 모든 폭격기의 출격결과를 수치화하고, 월별 폭탄투하의 종류 및 위치와 수, 그 효과를 분석했다. 그리고 적군보급로 차단 건수, 전사자 수 등 ‘영혼없는 수치’에 의존한 결과였다. 47) 한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소위 ‘뉴룩(New Look)’ 국방정책을 폈다. 이 정책 의 핵심은 “기술로 인력을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육군을 과감하게 감축하는 대 신, 기술군(技術軍), 특히 공군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미국은 베트 남전에서 톡톡한 대가를 치렀다. 베트남 정글에서 확전(擴戰)의 늪에 빠진 미국은 43)「경향신문」, 2010. 8. 23. 8면. 미국은 이라크전쟁을 시작하면서 대량살상무기(WMD) 제거, 알카에다 등 테러단체 분쇄, 이라크 민주주의 정착 등을 목표로 내세웠다. 44)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간 추가 파병에 대한 정책 결정과정에서 병력증파와 관련된 양측 주장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2권이다. 즉 UN 국제안보고문 골드스타인(Goldstein)의 저서 ‘재앙의 교훈’(Lessons in Disaster·2008)은 “베트남 전 당시 군부의 좁은 시각 때문에 전 쟁이 확전(擴戰)으로 치달았다”라고 주장하고 있고,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이자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 교수였던 루이스 솔리(Sorley)는 ‘더 나은 전쟁’(A better War·1999)에서 “군부가 제대로 판단했으나 여론에 밀린 정치인들 때문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역 설하고 있다. http://news.chosun.com. 2009. 10. 08. 검색. 45) Lewis Sorley, A Better War, A Harvest Books Harcourt Book, 1999, p.94. 46) ibid, p.107. 47) 오동룡,「국방이슈 추적」,『월간조선』8월호, 2010, p.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