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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사 사 / 기 타 군사연구 제130집 313 한편 이러한 비율은 미군의 경우 1967년 미군의 총 전사자 9,378명은 베트남 파병 미군의 2.5% 이하였다. 32)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당시 해병대의 전사자 비율은 <표 7>과 같이 높은 편이었으며, 이는 곧 해병대의 작전수행 여건의 어려움을 예시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표 7> 해병대 및 육군의 손실 비교 구 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해 병 병력 6,144 6,215 6,096 6,096 2,588 손실(%) 299(4.8) 306(4.9) 212(3.4) 137(2.2) 79(3.0) 육 군 병력 41,877 42,745 42,772 41,503 42,345 손실(%) 780(1.8) 601(1.4) 534(1.2) 513(1.2) 425(1.0) 다. 군사적 측면에서 본 제9사단 운용 베트남전쟁은 1975년 북베트남에 남베트남이 패망함으로써 미국의 패전으로 기록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자유우방군으로 참전했던 한국군은 승자인가 패 자인가? 지금까지 한국군의 참전에 관한 평가는 늘 긍정적인 시각에서만 분석되 었다. 즉 탁월한 민사작전으로 놀라운 평정작전 성과를 거두었고 남북을 잇는 1 번도로의 확보로 베트남 전쟁 초기작전에는 많은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 나 긍정적 측면에서만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결코 오 늘날 교훈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역사는 양자의 시각에서 균형되게 바라보고 서술되어야 한다. 1965년 수도사단의 파병에 이어 1966년 제9사단의 파병지역 선정시 캄란과 투 이호아에 이르는 작전지역보다 미군 측에서 요구했던 서중부 지역의 플레이쿠일 대에 배치되었더라면 전쟁에 어떤 기여를 했을까? 당시 이 지역은 전쟁의 결정적 장소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즉, 북베트남의 핵심전력 투입로인 호치민루트 동맥 을 절단하고, 인접국 캄보디아 및 라오스 접경지역으로부터 침투로도 봉쇄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시각에서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했던 한국군이 퀴논에서 깜란에 이르는 종적인 배치보다 19번 도로를 횡적으로 배치되 32) 니알 퍼커슨․김일영 외 譯, 『COLOSSUS』(아메리카 제국 흥망사), 2010, p.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