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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시 다국적군으로서 한국군의 역할 및 향후 과제 308 군사연구 제130집 베트남 전쟁은 1968년 1월의 케산전투와 뗏 공세 이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 됐다. 미군은 두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미국 본토에서의 반전여론의 확산과 존 슨 대통령의 대통령 불출마 선언에 이어 1969년 1월 닉슨 대통령의 취임, 동․서 냉전의 극한대결에서 화해를 통한 데탕트 모색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 됐다. 즉 닉슨은 한국전쟁 이후 적대관계를 유지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화해를 통해, 궁극적인 국교정상화를 달성하는 동시에 소련과의 긴장도 완화하는 것이었 다. 21) 닉슨은 전쟁을 가능한 빨리, 명예롭게 종식시키기 위해 군사적 방법이 아닌 협 상을 통한 전략으로 1969년 7월 25일 태평양의 미 해군기지 괌에서 아시아 국가 들은 핵공격을 당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부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방 어해야 하는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베트남전쟁의 ‘베트 남화(Vietnamization)’가 공식화되었다. 22) 그러나 전쟁의 베트남화는 이미 1968년 3월 31일 존슨이 뗏 공세 이후 북폭을 잠정 중단하고 협상을 통한 전쟁 종결을 모색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전장의 주도권을 포기한 것 과 마찬가지였으며, 시간과 공간에서 시간마저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전까 지만 해도 공간을 내어 주었으나 시간은 미군에게 있었다. 이를 계기로 북베트남 은 전쟁에서 유리한 조건을 형성하기 위해 줄기찬 공세를 계속했다. 1970년 4월, 미군과 남베트남군 2만여 명은 캄보디아내 ‘낚시바늘’ 지역의 남베 트남중앙본부(COSVN)를 격멸하기 위한 공격과, 1971년 라오스내 국경내 25마일 지점에 있는 기지 ‘체폰(Tchpone)’을 공격했다. 23) 캄보디아 및 라오스 국경지역의 북베트남군 기지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군사작전 원칙 측 면에서 보면 베트남전쟁 초기인 1967년과 1968년 기간 중 실시되었다면 조기에 전쟁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북베트남군의 주력 공격의 주 통로 인 호치민 통로를 봉쇄하고, 인접 국가들의 음성적인 북베트남군 지원을 단절하 여 전장 주도권 장악이 가능했었다. 21) 차상철,「박정희와 1970년대 한미동맹」,『군사』제75호, p.333. 22) 앞의 논문, pp.338∼339. 23) 미국의 캄보디아 공격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월리엄 쇼크로스․김주환 譯,『미국의 캄보 디아 침공, 숨겨진 전쟁』, 선인, 2003.을 참조. 캄보디아 공격에 관해서는 현재 많은 비 판적 시각이 있는데 토머스 J. 크라우프웰․채은진 譯,『대통령의 오판』, 말글 빛냄, 2010, pp.292∼30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