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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사 사 / 기 타 군사연구 제130집 303 필리핀군은 1953년 초 의사 및 간호원으로 구성된 지원단이 베트남 전역의 정 착촌과 마을들에 의료지원을 하기 위해 전개된 후, 1964년에 추가 의료진과 더불 어 16명의 육군 장교가 파병되어 제3군단의 고문단으로서 심리전과 민사작전을 지원했다. 이어서 1966년 7월에는 2,068명의 민사부대가 타이닌․틴투옹 성 등 4 개 성에 분산되어 탄티엔 난민 정착 프로젝터, 의료지원 등 다양한 민사활동을 수행 후 1970년 2월에 철수했다. 13) 여기에서 ‘탄디엔 난민 정착 프로젝터’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베트남 파병사 연구에 있어 한국군의 민사작전만이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필리핀군을 포함한 오스트레일리아 등 많 은 국가들이 나름대로 민사작전을 수행했다. 필리핀군은 이 작전을 통해 농업용 수풀지역 4,500ha 정리, 주민단지용 100ha 개발, 도로건설 41km, 22번 국도에 연 결되는 탄디엔과 신설 정착촌 마을 프억디엔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하여 1,000 세대의 난민가정을 정착시켰다. 14) 자유중국은 1964년 민사활동 분야로 제한하여 지원을 실시했다. 즉 정치전 고 문단을 비롯하여 지방지원 보건팀, 베트남 난민 구조, 농업전문가 등을 파병했다. 그리고 군사적 지원으로는 피난민 수송 목적의 C-46 형 수송기 2대, 5척의 LST 가 제공됐는데 이들은 1972년 12월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한편 당시의 세계정세는 국제적인 군사적 협력이 어려웠다. 특히 영국은 국 내․외의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개입은 극히 제한 했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은 내전의 성격으로 간주한 국가 가 많아 유엔의 개입 또한 어려웠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혼 란, 중동지역의 이스라엘과 아랍국가간의 갈등은 베트남전쟁에서 연합군의 참전 이 곤란한 상황이었다. 15) 나. 비전투병력 파병국의 역할 1964년 7월 14일 베트남정부가 지원을 호소한 이후 여러 나라에서 군사 및 비 군사지원을 제공했다. 1969년까지 미군을 제외한 5개국이 지상군 약 68,000명을 13) 앞의 책, pp.79∼93. 14) 위의 책, p.118. ‘탄디엔 난민 정착 프로젝터’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pp.118∼120.을 참조 할 것. 한국군의 베트남전쟁시 민사작전에 관해서는 최용호,「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의 작전 및 민사심리전 수행방법과 결과」, 경기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5. 참조 15) 국방부, 『파월한국군 전사』제1(상)권, 전사편찬위원회, pp.2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