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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사 군사연구 제130집 279 배경에서였다. LTTE 지도부는 간디 총리가 인도군 파병을 결정한 주역이라 판 단하고 피로써 보복했다. 간디 총리의 죽음 뒤 인도정부는 스리랑카 내전에 개입 하는 것을 삼가고 경제관계(무역, 투자 등)에만 치중했다(2008년도 인도-스리랑 카 교역량은 32억 달러). 그동안 인도 남부의 타밀족 주민들은 인도정부를 향해 “스리랑카의 타밀족이 어려우니 그들을 도우라”는 시위를 벌여왔지만 인도정부는 외견상 불개입 정책을 펴왔다. 1990년 인도군이 스리랑카에서 철수한 뒤 다시 스 리랑카 정부군과 LTTE 사이의 밀고 밀리는 지루한 소모전이 이어졌다. 인도의 스리랑카 개입 실패는 국제분쟁과 내전에의 제3자 개입이 반드시 전쟁종결로 이 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킨다는 준엄한 교훈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4. 미국의 스리랑카 정책 지난 동서냉전 시절에 스리랑카 정부는 전통적으로 비동맹 외교노선을 펴왔다. 이는 남아시아의 강대국인 인도의 비동맹 노선을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스리랑카 내전 과정에 미국은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개입해봤자(투입) 얻어낼 이익(산출)이 그리 크지 않다는 현실주의적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 다. 돌아보면, 1991년 소련이 분해됨으로써 냉전의 양극시대가 막을 내린 뒤 미국 은 유일 초강대국으로 지구촌 평화에 나름의 책임을 지려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 다. 실제로 1991년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침공군을 몰아낸 뒤 미 대통령 조지 H. 부시는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를 선언하면서 미국이 세계의 경찰로 지구촌 안보와 평화를 지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기근에 시달리던 소말리아에 ‘인도주의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이란 깃발을 내걸고 1992년 2만 명 넘는 미군을 파병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그러 나 1993년 10월 3일 하루 동안 벌어졌던 소말리아 모가디슈 시가전에서 18명의 미군이 사망한 뒤로 석유 등 중대한 국가이익이 걸린 곳이 아니라면 파병을 하지 않는 쪽으로 굳어졌다. 이를 가리켜 국제정치학에서는 ‘소말리아 신드롬’이라 이 름 붙였다. 미국에게 스리랑카는 그다지 중요한 나라가 아니다. 석유이권이 걸린 쿠웨이트나 이라크와는 다르다. 따라서 스리랑카 내전 과정에서 미국은 적극 개 입을 삼갔다. 1990년대 초 옛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양극체제가 무너진 뒤 ‘세계의 경찰’을 자부하던 미국이라도 석유가 아닌 홍차생산국 스리랑카 개입에 강력한 유혹을 느끼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