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page

스리랑카 내전, 정부군의 승리 요인과 반군 LTTE의 궤멸 요인 278 군사연구 제130집 송기를 보내 식량을 투하했다. 스리랑카 정부의 봉쇄정책으로 식량부족에 허덕이 는 자프나 반도 일대의 타밀족을 돕기 위한 조치였다. 스리랑카 정부의 반발은 물론 국제사회의 분위기도 고려해야 했지만, “동족을 도와야 한다”는 인도 남부 타밀 나두(Tamil Nadu) 주에 사는 6천만 타밀족의 정치정서(다시 말하면 유권 자들의 민심)를 인도 정치인들이 무시하기 어려운 부분도 작용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인도 정부는 스리랑카 개입정책을 수정해야 했다. 첫째 는 타밀 나두의 분리주의 집단들이 LTTE와 동맹을 맺고 인도 중앙정부의 통치 를 위협하는 일들이 벌어졌고, 둘째는 LTTE의 테러전술이 갈수록 치열하게 전 개되고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인도 정보기관이 테 러집단을 돕는다는 지적은 인도정부로서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 문제점 을 풀기위해 1987년 인도의 라지브 간디 총리는 스리랑카 사태에 적극 개입함으 로써 내전을 끝내려고 나섰다. 인도는 스리랑카와 ‘인도-랑카 협정’(the Indo-Lanka Accord)을 맺고, 스리랑카 내전에 개입했다. 이 협약에서 △인도는 타밀족과 LTTE에 대한 지원을 그치고, △LTTE는 무장을 해제하고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족의 자치를 허용하고 타밀어를 공식 언어로 삼기로 한다”고 합의했 다. 그에 따라 7만 명 규모의 인도 평화유지군(Indian Peace-Keeping Force, 약 칭 IPKF)을 교전지역인 스리랑카 북부와 동부에 파병됐다. LTTE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 협약에 따라 무장을 해제하기로 했다. 그러 나 몇 주 뒤 타밀 엘람(Tamil Eelam) 독립국가 수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인도 평화유지군이 파병됐지만 스리랑카에서 ‘지킬 평화’가 없었다. 결국 인도군은 ‘평화를 강제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LTTE와 무력충돌 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인도군은 내전을 그치게 하기는커녕 LTTE와의 전투를 통해 오히려 내전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아갔다. 결국 인도군이 내전종식에 도움 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린 스리랑카 대통령 프레마다사(Ranasinghe Premadasa)는 1990년 인도군 철수를 요청했다. 인도 정부도 비용 대 효과 면에 서 스리랑카 내전 무력개입보다는 철수 쪽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고, 1990년 초 마지막 부대를 철군시켰다. 파병 3년 만에 1천 5백 명의 전사자를 낸 채 인도군 은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LTTE는 인도정부에 깊은 배신감과 증오를 품게 됐다. 1991년 라 지브 간디 인도총리가 LTTE가 보낸 여성 자살폭탄테러범에게 죽은 것도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