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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내전, 정부군의 승리 요인과 반군 LTTE의 궤멸 요인 276 군사연구 제130집 를 넘긴 2003년 초 LTTE는 평화회담을 없던 일로 한다며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2004년 7월 콜롬보에서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났다. 2001년 뒤 3년 만에 처음 벌어진 자폭공격이었다. 스리랑카의 불안한 평화는 바로 깨졌으나, 2004년 스리랑카 지역을 휩쓸었던 쓰나미 피해로 3만 명이 죽는 참사가 일어남으로써 ‘2002년 휴전협정’은 그런대로 지켜졌다고 볼 수 있다. 비록 3만 명의 희생을 강 요하긴 했지만, 자연이 인간끼리의 전쟁을 일시적으로 막았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대목이다. 쓰나미 피해로 내전은 일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스리랑카 정부와 LTTE는 3억 달러에 이르는 국제사회의 지원금을 나누기로 합의까지 했다. 그렇지만 실제 로 분배가 이뤄지지 않았고 그런 과정에서 양쪽의 갈등은 더 깊어졌고 곧 내전이 다시 터졌다. 2005년 스리랑카 외무장관 카디르가마르(Lakshman Kadirgamar)가 LTTE 요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군사적 긴장이 다시 일어났다. 이는 그해 11월 스리랑카 총선에서 강경파 정당연합이 정권을 장악한 뒤부터였다. 그 직 후 스리랑카 의회는 국가비상사태법을 통과시켜 LTTE 진압에 총력을 기울였다. 일반적으로 전쟁이 오래 끌어 국민들 사이에 ‘전쟁피로(war fatigue)’ 현상이 높아 가면 갈수록 강경파 정치집단이 득세하기 마련이다. 이 같은 정치현상은 강 경우파 연합이 중도좌파정당들을 누르고 집권한 이스라엘 정치상황을 보면 잘 드러 난다. 스리랑카 정부가 LTTE에 대한 초강경노선으로 돌아선 것은 2005년 11월 총선 뒤부터였다. 마힌다 라자팍사(Mahinda Rajapaksa)를 우두머리로 LTTE 강 경진압책을 선거공약으로 내건 스리랑카자유당(Sri Lanka Freedom Party, 약칭 SLFP)이 여당인 연합국민당(United National Party, 약칭 UNP)을 근소한 표 차 이로 눌렀다. 라자팍사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정당연합을 통해 집권했는데, SLFP와 손잡은 정당들은 LTTE를 군사적으로 분쇄해야 스리랑카에 평화가 온 다는 정강을 내세운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인민해방전선(People's Liberation Front, 약칭 JVP)과 불교승려들의 정당인 ‘국가전통당’(National Heritage Party, 약칭 JHU)이다. 소수파인 무슬림 정당들도 LTTE 강경진압이란 측면에선 집권 여당과 손을 잡았다. 강경파 정당연합이 정권을 잡자마자 스리랑카 정부군의 공 세가 대규모로 펼쳐졌다. 그 공세는 느렸지만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 해인 2007년 7월까지 스리랑카 정부군은 그전까지 LTTE가 장악하고 있던 스리 랑카 동부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