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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내전, 정부군의 승리 요인과 반군 LTTE의 궤멸 요인 272 군사연구 제130집 이미 1960년대 초부터 간헐적인 폭동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타밀족 사이에 극단적 인 성향을 띤 단체들이 점차 늘어났다. 1970년대 중반 무렵 타밀족 사이엔 스리 랑카 중앙정부로부터 분리 독립해 오랫동안 그들이 살아온 스리랑카 북부에 그들 만의 독립국인 ‘타밀 엘람’(Tamil Eelam)을 세우자는 목소리들이 더욱 높아졌다. 1970년대는 두 민족 간의 갈등이 내전으로 치닫는 시기였다. 1972년 싱할리족 의 스리랑카 정부는 국가 이름을 ‘실론’(Ceylon)에서 ‘스리랑카’(‘빛나는 땅’이란 뜻)로 바꾸고 싱할리족의 종교인 불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스리랑카 내전은 다수 싱할리족의 횡포에서 위기감을 느낀 타밀족의 저항이라 볼 수 있다. 1976년 벨루 필라이 프라바카란을 지도자로 한 LTTE가 구성돼 타밀족 밀집지역인 스리랑카 북부와 동부를 근거지로 독립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까지 LTTE는 소규모 게릴라투쟁에 그쳐 본격 내전이 벌어지진 않았다. 1983년 내전이 터졌다. LTTE가 스리랑카 군 수송대를 습격해 13명을 죽이자, 스리랑카 전역에서 폭동 이 일어난 것이 시발점이다. 그때 수도 콜롬보를 비롯해 스리랑카 전역에 일어난 반 타밀 폭동으로 2천 5백 명쯤의 타밀족이 죽임을 당했고 약 10만 명의 타밀인 이 바다를 건너 인도 남부로 피란을 갔다. 정부군과 LTTE의 교전이 그때부터 본격화됐고 26년을 끌며 서로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했다. Ⅲ. 스리랑카 내전의 장기화 1. 26년 내전을 지속시킨 요인들 스리랑카 내전이 26년 동안이나 오래 끈 요인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기본적으로 어느 한쪽이 힘의 균형 상태를 깨뜨릴 만큼 강력하지 못했고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 지속됐다. 군사력(병력, 전투장비) 면에서는 스리 랑카 정부군이 반군 LTTE보다 조금 앞섰다. 그러나 LTTE가 26년 내전을 버틸 수 있었던 저력은 △소수민족으로서 “밀리면 모두 죽는다”며 결사항전을 다짐했 던 강인한 전투의지, △LTTE의 효율적이고도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처단하는 강 한 지도력, △해외 타밀족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탄탄한 재정지원, △LTTE 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