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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사 군사연구 제130집 271 서 우대해(이를테면 식민지교육을 받을 기회를 더 많이 줘, 식민통치기관의 하급 요원으로 충당함으로써) 식민지통치의 수혜자로 만들고, 다른 B부족(민족)을 홀 대함으로써 피지배층이 단결해 저항하는 것을 막고 서로를 미워하도록 갈등의 씨 앗을 뿌렸다. 1994년 100일 동안에 80만 명이 학살당한 르완다의 다수 후투족과 소수 투치족 사이의 내전은 그런 식민지적 유산의 갈등이 유혈투쟁으로 번진 대 표적인 보기다. 스리랑카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대영제국의 스리랑카 통치 담당자들도 분리 통치술을 썼다. 그곳 원주민인 ‘스리랑카 타밀족’을 우대하고 식민통치의 하급인 력으로 활용함으로써, 다수 싱할리족의 분노를 샀다. 더구나 영국은 스리랑카 남 부의 대규모 홍차 재배 농장에 필요한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도 남부의 타밀족을 대량 이주시켰다. 타밀족 인구가 늘어나자 다수 싱할리족은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1948년 스리랑카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싱할리족 정권은 대 학입학과 관리 채용에서 타밀족을 차별했다. 한편으로 싱할리족은 그들이 다수임 에도 언젠가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스리랑카와 인도 사이의 팔크(Palk)해협을 건너면 인도대륙 남부 타밀 나두(Tamil Nadu) 주에 6천 만 명에 이르는 타밀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3. 다수 싱할리족의 차별, 소수 타밀족의 저항 다민족사회로 구성된 한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내전의 원인을 보면 민족끼리 의 갈등과 불신이 쌓여가다가 어느 날 폭발하는 모습을 보인다. 안으로 타들어가 는 내전의 불씨에 기름을 붓는 쪽은 상호이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다민족사회 의 조화로운 존립을 거부하고 그가 속한 민족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강경파들이 다. 1990년대 초 발칸반도의 상황이 대표적인 보기다. 스리랑카도 마찬가지다. 1948년 독립 이래 다수 싱할리족에게 밀려 불이익을 받는다고 여기는 타밀족의 불만이 높아가던 무렵인 1956년 총선에서 싱할리 민족주의자인 반다라나이케 (S.W.R.D. Bandaranaike)는 “스리랑카 공식 언어는 싱할리여야 한다”며 싱할리 민족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집권에 성공했다. 반다라나이케는 교육정책이나 농업정책에서 싱할리족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정책을 펴며 타밀족을 차별대우했다. 이를테면 스리랑카 동부지역의 신개간지에 남부 싱할리 농민들을 대거 이주시켜 그곳 현지 타밀족의 분노를 샀다. 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