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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사 군사연구 제130집 245 25일 새벽안개를 틈타 은밀히 접근해 온 북한군에게 또 다시 고지를 빼앗 기고 만다. 이 당시 전투를 지휘했던 한국의 장창국(張昌國) 장군은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공격은 불가능했으며 제2차대전시 일본군이 뉴기니아섬 등의 전투 전례(前例)와 흡사했다.”고 증언한다. 결국 펀치볼 전투는 9월에 접어들어 날씨가 좋아지면서 연합군 공중지원에 힘입 어 승리하게 된다. 7. 맹추위가 몰아낸 남부군 “남한 지역에 북한군 4~5만 명을 남겨 후방작전을 전개한다면, 장차 작전에 크게 유리할 것이다.”라는 모택동(毛澤東)의 권유로 김일성(金日成)은 남한 지역 에서 게릴라전 8)을 펴기로 결정한다. 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남한 지역에 고립된 패잔병들을 규합하고 이들과 연합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위해 침투한 북한군으로 구성된 부대가 바로 게릴라 부대인 남부군이다. 이 부대는 총 3개 사단 2만 5천 명의 규모로 북한군 2군단에 소속되었으며 남한 지역에 제2전선 을 형성하여 연합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기 위해 운용되었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연합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면서, 동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3차 공세로 원주가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북한은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하여 게릴라부대를 제천과 영월로부터 영주와 봉화를 거쳐 안동까지 진출시 켰다. 이들의 남진 속도는 놀라울 정도여서 이 같은 기세로 남하하여 낙동강을 도하할 경우 상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에 미 8군은 궁여지책으로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천신만고 끝에 철 수해 마산에서 부대를 재정비 중이었던 미 해병 1사단을 게릴라 토벌 작전에 투 입하게 된다. 이 당시 게릴라들은 태백산을 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게릴라 토벌작전에 생소했던 미 해병사단은 산 속의 부락들을 찾아다니면서 헬기 와 화력을 집중하여 게릴라가 숨을만한 가옥들을 불태우고, 마을을 포위하여 집 중사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토벌을 반복해 나갔다. 식량과 의복, 의약품 등 필수 보급품을 현지에서 상당 부분 의존해야 했던 북한의 게릴라들은 산 속으로 쫓겨 8) 게릴라(Guerrilla) 작전은 적은 병력을 가지고도 엄청난 효과를 낼 수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병력이나 화력이 약한 쪽에서 즐겨 사용하는 전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