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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의 원인에 대한 재고찰 26 군사연구 제130집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고, 기회가 위기가 되기도 했다. 28) 그러나 북한의 행위 자들이 예측 불가능하다면, 어떤 신호가 위기를 가져올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 역시 쉽지 않다. 또 다른 대안은 쿠바 위기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대치하고 있는 두 행위자 사 이에서 긴급 연결선(hot line)을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하다. 대치하고 있는 두 행위 자 사이에서 어떠한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 가 조성될 가능성이 크며, 이는 결국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기 때 문이다. 물론 1970년대 말 중동 위기의 조정 국면에서 나타나듯이 대치자 사이에 ‘중재자’ 또는 ‘억제자’가 있는 것 역시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는 현재 주 한미군이나 6자회담 등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이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바로 박헌영의 20만 게 릴라 발언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는 단지 ‘수사적’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 나 단지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인식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 야 한다. 왜냐하면 북한의 《노동신문》은 항상 남한에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 이 많다고 보도하기 때문이다. 이게 단지 선전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이러한 ‘오판’을 하고 있을 가능성 역시 적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 남한 사람들에 대해 그다지 큰 고려를 하지 않고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신들의 주장을 남한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곤 한다. 이러한 남한 정세에 대한 오판은 북한의 대남전술의 무모함을 이해할 수 있을 가 능성을 제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6․25전쟁으로 돌아가 보자. 스탈린과 김일성, 그리고 박헌영은 왜 전쟁을 결정하게 되었을까? 본고의 분석에 기반을 둔다면, 이들의 오산과 오인, 또는 정 치적으로 계산된 판단과 인식에 의해 전쟁이 발발했다. 그렇다면 여기에 다른 하 나의 과제가 남는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렇게 잘못된 계산과 판단을 하도록 만들 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은 이들이 일부러 또는 정치적으로 이러한 계산과 판 단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앞으로 우리에게 전쟁의 기원과 관련된 또 다른 28) 1968년의 안보위기는 1971년의 남북적십자회담으로, 1972년의 7․4 공동성명은 유신체제 와 사회주의 헌법 채택, 1983년 아웅산 사건은 1985년 이산가족 방문으로, 1991년 남북기 본합의서는 1993년 북핵 위기로, 그리고 1999년 금강산 개방은 서해교전으로 이어진 것처럼 남북 관계는 위기와 기회를 교차적으로 반복하면서 1년 앞의 상황도 예상하기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