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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사 군사연구 제130집 243 비는 23일 새벽 04시경이 되어 겨우 멎었으나 호우와 함께 눈이 녹은 물로 도 로와 하천이 범람하여 전장은 몸도 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진흙탕이 되고 말 았다. 미군은 보급두절의 우려와 진흙탕, 공산군의 완강한 저항, 그리고 군단장인 무어(Bryant Moore) 소장이 전선시찰을 위한 비행 중 헬기가 한강의 탁류로 추 락하여 전사한 사건이 발생하자 작전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호우로 고전하던 미 해병사단은 3월 4일에야 겨우 횡성을 점령했다. 한편 원주~횡성 축 선의 우측에서 공격하였던 미 10군단과 국군 3군단의 공격지역에서는 험준한 산 악을 이용하여 제2전선을 형성한 북한군 유격대와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고 있었 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폭설이 내리면서(산악지역이기에 비대신 눈이 내림) 유엔 군의 기동은 극도로 제한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공격부대들의 진격은 지연되어 겨우 3월 6일에야 예정된 목표선에 도달하였다. 미 8군은 14일간(2.21~3.6) 계속된 “도살작전”에서 퇴각하는 적의 주력을 섬멸 하기 위해 기동성이 우수한 미군사단 위주로 추격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기상이변(氣象異變)으로 후퇴하는 적을 포위 섬멸하지 못하고, 진흙탕 위로 겨우 겨우 전진하여 적의 뒤를 쫓아가는 수준에 그치면서 작전을 종료하게 된다. 미군은 전사에서 이 전투를 ‘도살(Killer)작전을 죽인(Kill) 호우전투’라고 명명하 고 있다. 6. 장마와 펀치볼(Punch bowl) 전투 1951년 7월 10일 시작된 휴전회담이 아무런 진전이 없자 유엔군 사령관 리지 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은 “군사력에 의한 압력으로 협상을 강요한다.” 는 전략을 마련했다.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은 7월 21일 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에게 동부지역에서 공산군의 전략적 요충이자, 아군 방어 의 취약지역인 ‘펀치볼(Punch bowl) 7)지역’을 우선적으로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미 2사단 38연대는 국군 1해병연대가 탈취한 도솔산으로부터 펀치볼의 서측방 을 공격하여, 대우산~가칠봉 방향으로 진출할 계획을 수립하고, 7월 27일 공격을 개시하여 대우산(해발 1,178m)을 탈취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쏟아진 30년만의 집 7) 정식명칭은 해안분지(亥安盆地)이지만 펀치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때의 격전지로, 외국 종군기자가 가칠봉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화채 그릇(Punch Bowl)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