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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219 천에 진출한 이후 대체로 봉의산에 방어시설을 설비하고 주둔하였을 것이며, 우두 산성을 신라가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다면 이는 신라가 춘천에 진입한 이후 기존 세력이 사용하던 우두산성을 계속 재사용하다가 문무왕대에 봉의산에 산성을 신 축하고 주근거지 城(治所城)을 이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 한다. 필자는 신라가 우두산성을 사용하다가 江 남쪽이며 더 험준한 봉의산으로 이전한 것이라는 가정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신라는 남쪽에 근거지(수도)를 가 진 나라이기 때문에 당나라와의 전쟁이 더욱 격화되어가는 위기 상황에 봉착하면 서 더 험준하고 견고한 요새지가 필요했고 더구나 江 북쪽이어서 배수진이 되는 우두산보다는 전면에 강을 두고 지킬 수 있는 봉의산 쪽이 전투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 蒙古軍에 의해 春州城(봉의산성)이 함락된 이후 봉의산성 은 더 이상 춘천의 입보성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고려시대 異民族의 外侵으로 빚 어진 전쟁은 기존의 양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민족의 침략은 영토쟁탈전이 아 니라 약탈성이 강해지고 많은 人命의 死傷과 납치가 수반되었다. 결국 이러한 전쟁의 양상은 입보용 산성을 전략적으로 활용보다는 피란성에 비중을 두게 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산성을 매우 험준하고 궁벽한 곳에 구축하게 하였다. 춘 천의 경우 봉의산성이 폐기되면서 삼악산성과 용화산성이 입보성으로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춘천은 새로운 관방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특히 병자호 란 당시 있었던 이동의 문제(바다나 강을 건너 피신하는데 많은 시간 필요)라 든가 방어력 문제(믿고 있었던 강화성과 남한산성이 모두 함락)가 대두하면서 보다 다른 보장처를 물색하게 되었고 춘천은 그 후보지의 하나로 부각되게 되 었다. 당시 춘천에 대한 주목은 춘천이 가지고 있는 지형적인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춘천은 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역인데다가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이어서 어느 쪽에서 적이 공격을 해 오더라도 쉽게 점거하기 어 려운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춘천에 대한 보장처 인식은 근대에 이르러 서양 과 일본의 세력이 밀려와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고 춘천에 유수부를 만들고, 감영을 설치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현대전은 전근대시기의 전투와는 그 양상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군 사작전에는 정도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그 지형적 이점이라는 것이 작용하게 마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