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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춘천의 군사적 거점과 가치 216 군사연구 제130집 를 구축하고, 38도선에서 춘천까지의 거리가 13㎞에 불과한 점을 감안해 진지 구 축에 주력했다. 77) 그러나 육본의 재정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던 연대는 사단 공병중대와 춘천시 민 및 학생의 도움을 받아 전쟁발발 한 달 전인 5월 하순에 공사를 끝마칠 수 있 었다. 이 무렵 6사단의 화기와 장비 수준은 정면의 북한군 제2군단과는 양과 질 적인 면에서 모두 열세에 있었고, 북한은 국군이 보유하지 못한 최신형의 대구경 곡사포는 물론 자주포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1950년 6월로 접어들어 38도선 일대에는 전운이 감돌면서 긴장감이 고조돼 갔 으며,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 국군 6사단의 좌전방을 담당하고 있는 7연대 경계지역에 북한군 2사단이 공격을 개시했으며, 적은 화천-신포리-춘천 축선에 공격을 집중하고 있었다. 강력한 포병의 공격준비사격으로 시작된 적의 포격은 38도선을 따라 경계진지가 구축된 인람리 및 지암리 일대에 집중됐다. 약 1시간 에 걸친 공격준비사격이 끝나고 북한군 제2사단의 주공연대인 제6연대가 국군 제 3대대 제9중대의 정면인 마평-상송암 선으로 SU-76 자주포와 함께 연대 규모의 병력으로 공격해 왔다. 78) 그러나 아군은 험악한 산악지의 중요 지역에만 경계병 수준의 병력만을 배치 함으로써 대규모 병력으로 침공해 온 적을 격퇴할 수 없었다. 각종 포의 지원 아 래 점점 병력이 증원된 적은 5번 도로를 따라 내려와 선두가 용산리까지 도달하 고 있었다. 이에 따라 9중대는 방어선에서 철수해 우두산을 거쳐 소양강 남안의 지내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또 북한의 제4연대는 국군 제7연대 제2대대 가 방어하고 있던 추전리 및 부용산 좌측 계곡과 발산리의 소로를 따라 공격을 가해 왔으며, 결국 진지가 돌파되어 지내리와 우두산 일대로 철수했다. 국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소양강 북안의 방어진지를 지켰고, 일부 병력은 화천 방향에서 북한강 북안을 따라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서면 금산리 일 대에 포진하였다. 북한의 주력군은 춘천으로의 진입을 시도하면서 용산리, 지내리 및 우두산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6월 26일 북한군은 전력을 증강하 77) 위와 같은 책, 446․447쪽 참조. 78) 이하 전투 개요에 대한 것은 「한국전쟁초기, 춘천․홍천전투가 전세에 미친 영향」(김기옥, 軍史 제12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6), 강원도사 현대편(강원도, 1995), 6․25 戰爭史 2, 北韓의 全面南侵과 初期 防禦戰鬪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의 <제5장 3절 춘천-가평전투> 부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