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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215 서 38도선을 돌파한 후 서울을 점령하고, 북한 2군단은 화천-춘천과 인제-홍천 방면으로 진격하여 춘천과 홍천을 각각 점령한 후 서울 동남쪽과 수원 방향으로 우회 기동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즉, 북한군은 1․2군단의 고속기동부대를 통해 한강교를 조기에 점령하고 수원이남지역을 차단함으로써 국군의 퇴로 및 증원을 차단하고 2일차에 홍천에서 원주로 진출하는 1개 보병사단이 국군 전선을 동서로 양단시켜 상호 지원하지 못하도록 한 후 각개 격파하도록 하였다. 75) 북한군 2군단 중 춘천 방면에 대한 공격은 제2사단이 맡고 있었다. 이청송 소 장이 지휘하는 제2사단은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에 실시한 북한군 자체검 열에서 최우수부대로 선정될 정도로 전투력을 인정받고 있는 사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공격 당일 춘천을 점령한 후 가평으로 진출하고, 다음날 경춘가도를 따라 진격해 덕소에서 한강을 도하한 후 서울 동남쪽으로 진출하는 임무가 부여 됐다. 이는 서울 동남쪽에서 국군의 예비전력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면서 그들 의 주력인 북한 1군단의 좌측방을 엄호한다는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1949년에 청주에서 원주로 이동해 사령부를 설치한 국군 제6사단은 사단 장 김종오 대령의 지휘하에 현리에서 가평에 이르는 84㎞의 넓은 구간의 경비를 맡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춘천과 가평지역은 임부택 중령의 제7연대가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제7연대는 1949년 2월 20일 청주에서 원주로 이동해 2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5월 3일 춘천으로 이동하였고, 제8연대로부터 화천 방면의 책임지 역의 경계임무를 인수받았다. 76) 그러나 연대는 넓은 방어정면을 담당하고 있어 중요 지형과 적의 예상접근로에만 병력을 배치하고, 나머지 지역에는 작전지역 내에서 동원된 대한청년단원을 배치해 군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의 경계와 조기경보임무를 부여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 6사단의 방어개념은 춘천에 중점을 두고 적이 공격하면, 이를 진지 전방에서 격파해 38도선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적의 공격이 화천-춘천 접근로로 집중될 것으로 판단한 국군 6사단은 포병화력을 춘천에 집중 배치해 대비하고, 화천-춘천 간을 방어하고 있던 제7연 대는 춘천이 38도선에 인접해 있는 사실을 감안하여 이곳으로 이동한 직후부터 방어진지 보강공사에 착수하였다. 처음에는 38도선 부근 주요 접근로에 토치카 및 유개호를 구축하고 이미 만들어져 방어지역에 철근 콘크리트로 된 대전차진지 75) 위와 같은 책, 9쪽. 76) 위와 같은 책, 4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