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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춘천의 군사적 거점과 가치 214 군사연구 제130집 장하는 일개 군수의 지위로 전락하였고, 이에 따라 친군진어영사라고 하는 춘천 유수의 특권적인 군사적 지위도 상실되었다. 이후 1895년 5월 칙령 제97호 <감 영, 안무영과 유수 폐지에 관한 안건[監營按撫營竝留守廢止件]>, 칙령 제98호 <지방 제도의 개정에 관한 안건[地方制度改正件]>이 발포되면서 춘천은 강원 영 동지역을 관할하는 강릉부와 함께 강원 영서지역을 관할하는 관찰부가 된다. 71) 이때 강원감영도 춘천이궁의 문소각으로 옮겨지게 된다. 72) 그러나 한 해 뒤인 1896년에는 칙령 제36호 <지방 제도와 관제 개정에 관한 안건[地方制度官制改正件]>을 통해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 1부 1목 322군을 신 설하는 지방제도 개혁안이 공포된다. 73) 이에 13도 체제하에서 강원도의 감영은 원주에 다시 설치되지 않고 춘천에 설치되었다. Ⅶ. 6․25전쟁시 춘천전투와 군사거점 춘천은 조선말 지방제도 개편과정에서 감영이 설치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도 계속 강원도의 도청소재지가 됨으로써 강원도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 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남북 분단이 되자 춘천은 38도선에서 가장 가까이 있 는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따라서 춘천은 당시 남한의 그 어느 도시보다도 군사적 긴장이 가장 높은 곳이 되었다. 당시 남북의 군사대결 국면에서 수도를 중심으로 보면 춘천은 우회로에 해당하는 곳으로 군사적 요충으로서의 가치는 다소 낮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었으나 실제 6․25전쟁 과정에서 춘천지역에서의 성공적인 방어전투는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중대한 戰史로 평가되게 되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기본 전략은 2일내에 신속하게 서울을 점령하고 한 강이북에 배치되어 있는 남한의 전방사단을 섬멸하고 신속하게 남해안까지 진출 하여 주요 항구를 점령함으로써 미군이 한반도에 증원되기 전에 전쟁을 종결짓는 다는 것이었다. 74) 이러한 기본계획에 따라 군단 및 사단급 공격부대의 기동계획 을 수립하였는데, 주력공격부대인 북한 1군단은 금천-구화리와 연천-철원 방면에 71) 고종실록 권33, 32년 5월 26일(병신). 72) 강원도지 권2, 公廨. 73) 고종실록 권34, 33년 8월 4일. 7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戰爭史 2, 北韓의 全面南侵과 初期 防禦戰鬪 , 2005, 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