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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춘천의 군사적 거점과 가치 212 군사연구 제130집 많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광대하여 자급자족이 가능한 중국의 성도와 같다면서 춘천이야말로 국가위난의 시기에 국운을 보존할 수 있는 중차대한 지역이라고 주 장하였다. 65) Ⅵ. 근대시기 춘천의 군사적 요충으로서의 평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춘천은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으 면서 점차 행정단위의 位格이 승격되어 왔다. 이러한 흐름은 근대에 들어 국제정 세의 급변과 조선내의 위기감 고조로 춘천은 또다른 측면에서 급격한 발전을 이 어가게 되었다. 춘천에는 1884년 4월 이전까지 춘천에는 구식병대 1백 명, 반관반농적 성격을 지닌 포군 1백 명 등 도합 2백 명의 군대가 설치되었다. 66) 이후 1888년 춘천에 유수부가 설치될 때까지 춘천부사는 병대와 포군을 거느리고 강원도독련어사직을 겸직하면서 실질적으로 강원병사의 직무를 맡은 것으로 여겨진다. 춘천지역에 대한 유수부 설치는 1888년 4월 영의정 심순택과 판부사 김홍집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고종은 지시하기를,. “춘천은 바로 동북쪽의 관문이다. 옛날 丁卯胡亂때 단지 200명의 精兵만으로 石坡嶺에 서 싸워 이겼으므로, 그 후에 防略使를 두었고 또 防禦營을 둘 것을 논의했는데 실현 과 같고 춘천은 관중의 長安과 같다. 중첩한 산이 사방에 둘러싸여 옹호하였고 두 강물 이 후면에서 합류되었고 가운데에는 비옥한 들판이 열려서 주위가 수백 리에 달한다. 삼 면을 막고 지키면 한 사람이 관문을 막고 있으면 만명도 뚫고 나가지 못할 것이니, 정말 난공불락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이다. 3면에 병영을 설치해야 하는데 金化의 길목은 北道 로 통하는 선로의 요충이며, 가평의 길목은 서도로 통하는 요충이요, 홍천의 길목은 남도 로 통하는 요충이어서 명령을 사방으로 전달할 수 있다. 혹은 깊은 시내 오목한 골짜기 에 돌층계를 놓고 혹은 산맥이 끊어진 곳, 산길이 험한 요지를 이용하여 병영을 설치하 여 문에 빗장을 걸어 놓는다면 안방에 들어앉은 것처럼 안전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 밖 에 주둔병을 두어 서로 호응하게 하며 창고를 설치하여 漕運을 이용하는 등 여러 가지로 도모해야 할 것이다.」 65) 茶山詩文集 제22권 雜評 汕行日記 「내가 생각건대, 춘천은 우리나라의 成都이다. 孔明 은 蜀 땅을 점거하고 회복을 도모하였으며, 明皇은 촉땅으로 파천하여 위기를 모면하였 다.」(심경호, 茶山과 春川 , 강원대학교 출판부, 1995, pp.61~62․p.171 참조). 66) 고종실록 권22, 22년 3월 24일(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