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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211 춘천이 국가적 차원에서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가치에 대해 보다 크게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 것은 숙종대이다. 숙종초에 춘천은 지세가 험준하므로 축성하여 지키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병조판서 김석주는 직접 춘천을 조사하고 숙종에게 “신이 이 땅을 가서 살펴보니, 형세가 가장 좋아서 성을 쌓기에 합당 하고, 싸워서 지키는 땅이 될 만합니다”라고 보고하였다. 58) 이후 춘천에 축성을 하지는 않았지만 숙종 20년(1694)에는 춘천방어사를 문 신으로 임명하지 말고 반드시 종2품 무관으로 명망이 있는 자를 보내도록 하 는 조치가 있었다. 59) 이 때 이러한 조치는 아마 관찰사와 같은 품계인 종2품 고관을 보내면서 관찰사와는 별도로 강원도 병마사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였 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듬해인 1695년 남구만의 건의에 따라 춘천부사 가 종전처럼 방어사를 겸직하면서 전란이 있을 경우 강원도 영동과 영서지역 의 營將을 통솔하도록 하되 반드시 武臣을 임명하도록 하였다. 60) 그러나 이후에도 여러 차례 춘천에 병마절도사를 별도로 두는 문제가 건의 되기도 하였으나 시행되지는 않았으며 61) , 영조 22년(1746)에는 강원도 심리사 구택규의 건의에 따라 춘천의 방어영을 철원으로 이설하게 되었다. 이는 춘천 의 방어영 설치가 주로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 사유가 되 었는데, 남북의 要路를 지키는 일이 더욱 중요하므로 北關의 여러 길의 要會地 인 철원으로 방어영을 옮기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62) 이에 춘천은 鎭營이 되 고 철원은 防營으로 개편되었다. 63) 이익은 춘천이 난공불락의 유리한 지형조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춘천의 주 변인 김화, 가평, 홍천의 길목에 병영을 설치하여 지키고 그 외에 주둔병을 두어 병영과 호응하게 하고 창고를 설치하고 조운을 이용한다면 전란시 춘천만이 국가 보장지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64) 정약용도 춘천은 산이 험하고 강에 파도가 58) 숙종실록 권4 숙종 1년 11월 임인. 59) 숙종실록 권27, 숙종 20년 12월 무오. 60) 숙종실록 권28 숙종 21년 4월 갑오. 61) 숙종실록 권45 숙종 33년 3월 을축; 영조실록 권 7 영조 원년 9월 계묘. 62) 영조실록 권63 영조 22년 6월 병자. 63) 영조실록 권64 영조 22년 12월 경오. 64) 성호사설 , 제2권, 天地門, 春川保障. 「가령 참화가 일어나 전쟁이 계속될 경우에 자체를 방어할 곳을 물색한다면 춘천 한 곳이 있을 뿐이다. 춘천은 곧 옛 貊國이다. 내가 博川 集 을 보니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지금 비유하자면 서울은 洛陽과 같고 關東은 關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