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page

역사상 춘천의 군사적 거점과 가치 210 군사연구 제130집 “춘천은 바로 동북쪽의 관문이다. 옛날 정묘년 오랑캐의 난리 때 단지 200명의 정예한 군사를 가지고 石坡嶺에서 싸워 이겼으므로 그 후에 防略使를 두었고 또 防禦營을 둘 것을 논의했는데 실현하지 못하였다”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53) 이를 보면 1627년 정묘호란 당시 가평쪽에서 춘천으로 진입하려던 후금 군사가 춘천 석파령에서 패퇴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631년(인조 9)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신득연이 인조에게 보고한 내 용에 “본도에는 한 곳도 關防이 없는데, 위급할 때의 대비가 이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원주에 鴒原城이 있고 춘천에도 산성이 있으니 모두 수축하는 것이 온 당한데, 신이 도임한 뒤에 이 일을 계품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54) 당시 신 득연이 부임한 후에 춘천에서 산성을 수축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 시 이미 후금과 한 차례 전쟁을 치루었고 군사적 긴장이 계속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시기에 춘천지역에 있는 산성을 수축하여 대비하였을 가능성이 크 다. 55) 이는 강원도의 중부 내륙지역에서 춘천과 원주는 큰 고을이고, 북방으로 부터의 침입이 있을 경우 과거의 사례를 보면 대개 철원-춘천을 거쳐 원주지 역으로 공격해 왔으므로 이들 지역은 상호 매우 긴밀한 군사적 保障관계가 있 는 것이다. 즉, 철원을 그대로 두고 남쪽으로 내려와 춘천을 공격하는 것은 통 상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마찬가지로 춘천을 그대로 두고 원주로 내려가 원주의 城을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인조대 호란을 계기로 춘천 에 대한 군사적 중요성은 크게 부각되었고, 이는 춘천의 방어영 설치로 이어졌 다. 56) 또한 1638년(인조 16) 비변사에서 춘천은 道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다 감영과 서로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春川營將을 지내면서 군사적인 면에서 능력을 보인 회양부사 權井吉을 춘천부사와 서로 바꾸어 겸방어사로 칭하여 兵事를 맡기자고 건의하여 윤허를 얻고 있는 것에서도 그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57) 53) 고종실록 권25 25년 4월 경자(19일). 54) 인조실록 권25 인조 9년 8월 계묘. 55) 이 시기에 춘천지역에 산성을 수축하였다면 과연 어느 산성을 수축하였는지는 기록이 남 아있지 않다. 다만 정묘호란 당시 석파령에서 승전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석파령 옆에 있 는 삼악산성을 수축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56) 關東誌 권6 춘천 건치연혁. 57) 인조실록 권36 인조 16년 1월 갑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