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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209 평창을 점령하고 영월 주천을 빠져서 神林을 거쳐 원주로 침입하니 이때 원주 치 악산 영원산성의 혈전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50) 또한 一支隊는 가평, 춘천 방면 으로 침입하였다. 당시 강원도 영서지역의 경우는 회양을 비롯한 춘천, 가평 일대에서 주로 전투가 벌어졌다. 1592년 6월 초 毛利吉成의 軍은 휘하 13,000여 병력으로 主將 島津義弘 등과 함께 서울에 들어갔다가, 강원도 방면의 分守 명령을 받고 강원도에 침입해 들어 왔다. 4번대 主將 島津義弘은 경기도 永平郡(加平郡 영중면)에 자리잡고 앉아 서, 그의 幕僚長인 毛利吉成을 강원도 監營이 있는 원주에 주둔케 하고 그의 部長 으로 있는 아들 島津忠豊으로 하여금 春川을 공략케 하였다. 島津忠豊은 500여 명 의 병사를 이끌고 춘천에 들어와서 방화⋅살인과 갖은 약탈을 자행하였다. 51) 이때에 강원감사로 있던 柳永吉이 원주에서 이곳에 은신하고 있었는데 급한 전 황에 당황한 나머지 여주에서 용전을 거듭하고 있는 원호에게 급사를 보내 춘천 방면으로 이동하라는 전문을 내렸다. 元豪는 춘천에 와서 춘천부사 朴揮와 함께 우두산에 있는 적을 대파하고 陣兵山(新東面 甑里)에서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적 을 府中에 포위된 상태로 갇히게 만들었다. 전멸을 목전에 두고 있던 왜장 島津忠 豊은 加平에 있는 그의 親父 島津義弘에게 구원을 요청, 그의 다른 아들 島津久保 가 구원병을 이끌고 와서 이를 구하여 華川, 金化 방면으로 도주하여 그의 父 島 津義弘과 합세하였다. 이후 防禦使 元豪는 김화로 적을 추격하여 彼我間 많은 사 상자를 내며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52) 한편 한성을 떠나 강원도 방면으로 침공을 시작하여 金化⋅金城을 빼앗은 毛利 吉成이 이끄는 왜병은 이어서 회양을 향하여 쳐들어 가게 되었다. 이 당시 淮陽城 은 이미 그 성곽이 황폐되고 기계와 자재가 모두 망실되어 모든 물건들이 다 없 어진 상태였다. 府使 金鍊光은 이러한 가운데에 새로 도임하여 아직 열흘도 채 못 되었지만, 군사를 다시 모으고 무기를 새로 마련코자 주야로 힘써 전투에 임하였 으나 결국 패전하여 부사 이하 수많은 병사가 전사하였다. 이후 두차례의 胡亂이 있었으나 춘천지역에서의 직접적인 전투에 대한 당대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고종실록 에 의하면 고종이 신하들에게 한 말 중에 50) 江原道, 江原道史 , 1995, 933~946쪽 참조. 51) 春川市, 春川百年史 , 1996, 2,189쪽. 52) 위와 같은 책, 2,189․2,1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