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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춘천의 군사적 거점과 가치 208 군사연구 제130집 면서 산성은 점차 폐지되고, 16세기 중반경에는 전국적으로 41개 정도의 산성만 이 남아있게 되었다. 춘천의 경우는 군사적 거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면 당시 춘천지역의 거점입보성으로 운영되던 곳이 화천과 춘천의 경계에 있는 용화산성이다. 용화산성은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 고성리와 화천군 간동면․하남면 일대 사이의 용화산(해발 878m)에 축조한 산성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龍華山石城”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 452步 4尺이며, 작은 샘이 3개소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산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古跡條에 기재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미 16세기에 이르면 폐성되었다. 용화산은 화천군과 춘천시의 분계를 이루는 곳으로 서쪽으로는 춘천시 고성리 일대가, 서북쪽으로는 화천군 牲山城 일대가 보인다. 그리고 동북쪽으로는 화천군 유촌리 일대와 병풍산까지 바라다 보인다. 용화산성은 남쪽면이 모두 암벽으로 둘러 쌓여 천연적인 성벽을 형성하고 있어서 성벽을 축조하지 않았다. 산성에서 는 춘천 방향에서 접근하는 도로와 화천방면에서 접근하는 도로가 모두 환히 조 망되고 있다. 총 길이는 약 825m 정도이고, 기록에는 샘이 3개소라고 하였으나 현재 정상부와 서북쪽에서 샘이 확인되며, 문터와 건물지, 望臺址가 있고, 특히 정상부에는 소규모의 토루가 남아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계기로 평지에 축성한 읍성이 거의 방어력을 발휘하지 못 하면서 다시 전통적인 산성유익론이 설득력을 갖게 되어 임진왜란 기간 동안 전 국적으로 많은 산성이 수축되었다. 1592년 침략한 일본군은 부산과 동래를 이틀만에 함락시키고, 三路로 부대를 나 누어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20일만에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서북과 동북지역으로 계속 진격하였고, 이때 부산에 제4진으로 상륙한 毛利吉成의 부대는 동두천으로 올라가서 철원, 평강, 김화, 회양을 점령한 후 철령을 넘어 함경남도 안변으로 들 어가서 다시 강원도 영동지역으로 남하하면서 공격 또는 약탈하였다. 일본군은 安 邊에서 통천, 고성, 양양을 거쳐 강릉으로 침입하였으며, 一支隊는 西向하여 양양 에서 설악산을 우회하여 인제로 들어가고 주력부대는 三陟으로 내려가 두타산성 을 함락시켰다. 왜군이 삼척에 도착한 것이 7월이고 여기서 주력부대는 주둔하고 一支隊는 남하하여 蔚珍, 平海를 분탕한 후 다시 삼척의 서쪽 백복령을 넘어 정선, 영월을 분탕했다. 이들은 그 후 忠北 永春으로 나갔다가 다시 남한강 상류를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