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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역 사 및 역 사 일 반 군사연구 제130집 207 황이었기 때문에 고려는 全面戰보다는 장기전으로 끌고가면서 상대의 허실을 틈타 공격을 감행하는 이른바 게릴라전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장기 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인적, 물적 자원을 보존할 대책이 필요하였고, 고려 는 주로 산성이나 海島로의 입보를 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 의 기록 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49) 삼국시대에도 수많은 산성이 축조되고 유사시 산성에 입보하는 방어전술을 구사하였지만 당시의 산성은 대개 주민 주거지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하 였다. 이는 전쟁의 규모나 양상 또는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산성내 邑治 설치 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이러한 전쟁의 양상은 입보용 산성을 전략적으로 활용보다는 피란성에 비중을 두게 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산성을 매우 험준하고 궁벽한 곳에 구축하게 하였다. 춘천의 경우 봉의산성이 폐기되면서 군사적 거점으로서 삼악산성과 용화산성이 입보성으로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Ⅴ. 조선시대 춘천의 군사적 거점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개국초기에 수도가 한양으로 옮겨지고, 북방에서는 명 나라가 확고한 위치를 갖게되면서 변화에 따르는 방어체제 정비가 이루어져 갔 다. 도성은 태조의 천도와 함께 新都 漢陽에 축조되었다. 한편 1410년(태종 10) 경을 전후하여 왜구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타타르 원정과 女眞에 대한 압박, 그 리고 征倭說 등 동북아 지역에서의 여러 긴장이 조성되면서 북방의 여러 거점 성곽은 물론이고 경상도․전라도에 대규모 산성을 수축하였다. 또 1413년(태종 13)에는 各道의 각 고을 3, 4息안에 하나의 산성을 수축하고 창고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축성책의 추진으로 조선초기에는 전국적으로 약 111개 정도의 산성이 있었으며, 이는 8도 330개 행정구역 가운데 약 1/3 정도의 지역에 산성이 구비되어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세종대 이후 山城入保 방어체제가 퇴조하 이루 셀 수가 없었으며 그들이 지나간 州郡들은 다 잿더미로 되었다. 蒙古 兵亂이 있은 뒤로 이보다 심한 때는 없었다”라고 전쟁의 참혹성을 기록하고 있다. 49) 高麗史 卷第八十一, 志第 三十五, 兵 一, 兵制 四; 高麗史 卷第二十四, 高宗 三, 40年 7月 甲申; 高麗史 卷第七十八, 志第 三十二, 食貨 一, 田制 經理; 高麗史 卷第二十四, 高宗 三, 42年 3月 丙午; 高麗史 卷第三十, 忠烈王 三, 16年 10月 戊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