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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춘천의 군사적 거점과 가치 206 군사연구 제130집 2년(1350)부터 恭讓王 4년(1392)까지 40여 년간 지속된 왜구의 침입은, 몽고와의 대전란 이후 심화된 고려왕조내의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인 무질서를 극복하려는 일련의 개혁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왜구는 당초 주로 연해지방에 출몰하였으나 14세기 중엽인 충정왕 연간에 접어 들면서부터 왜구들의 규모가 대형화되고 침입대상 지역도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때부터 왜구는 고려의 해안이나 도서지방에 빈번히 침 입하여 조운선을 탈취하거나 민가에 방화하고 살육과 약탈을 감행하기 시작하였 다. 공민왕대(1352~1374)에 이르러 왜구는 더욱 기세를 떨쳐, 이 기간 동안에 무려 100회가 넘게 침탈하였다. 삼남지방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경기⋅황해⋅강원⋅평안⋅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전국 어느 지역도 빠진 곳이 없었다. 특히 왜구의 침입이 극 심했던 시기는 禑王代(1375~1388)였다. 이 시기에 왜구는 370여 회에 걸쳐 고려 를 침입하였다. 우왕 8년(1382) 3월에 왜구는 삼척⋅울진⋅羽溪(강릉) 등 동해안 일대를 침입하였고, 4월에는 江陵道上元帥 趙仁壁과 부원수 權玄龍이 침입해 온 왜구와 싸워 적 30명을 베었다. 46) 1383년 관음포전투 이후에 왜구는 침입의 양상을 바꾸어 내륙지방으로의 침입 을 시도하였다. 강원도 지역의 경우 평창, 영월, 정선, 김화, 평강, 회양, 춘천, 화천 등 내륙지역까지 왜구가 출몰하게 되어 여러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렇게 내륙지방에까지 왜구가 침입해 들어옴으로써 연해지방에서 뿐만 아니라 내륙지방의 방어시설도 대대적으로 정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왜구는 安邊 府․歙谷縣․洞山縣(양양 속현)․高城浦 등에도 침입하여 많은 피해가 있었으나, 고려군의 적극적인 토벌작전으로 왜구는 점차 소멸되어 갔다. 47) 고려시대 경우 특히 蒙古와의 전쟁은 기존의 전쟁 양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 민족의 침략은 영토쟁탈전이 아니라 약탈성이 강해지고 많은 人命의 死傷과 납치가 수반되었다. 48)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 46) 이하 왜구침입과 관계된 주요 내용은 江原道史 (江原道, 1995, 609~612쪽)와 高麗史 를 참고하여 서술함. 47) 위와 같은 책, 611~612쪽. 48) 高麗史 에 보면 여진 침입에 의한 납치 사건 기사를 자주 볼 수 있으며, 蒙古 침입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양민 납치가 자행되었다. 특히 高宗 41年(1254) 12月 甲午日 기사를 보 면 “이해에 蒙古軍에게 잡혀간 남녀가 무려 26만 6천 8백여 명이요, 살육을 당한 사람은